충남 공주 태화산 마곡사(麻谷寺)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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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공주 태화산 마곡사(麻谷寺) (3)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10.31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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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사찰순례(72)
마곡사 대광보전과 고려시대 만들어진 오층석탑

 ‘춘마곡추갑사(春麻谷秋甲寺)’라는 말이 전한다. 마곡사는 봄 경치가 뛰어나고 가을 경치는 갑사가 뛰어나다는 말이다. 단풍이 울긋불긋한 산사는 어느 곳이나 아름답다. 더욱이 마곡사처럼 시내를 끼고 있는 산사인 경우 시냇가 주변의 나무와 그 색깔을 그대로 머금은 물빛이 가을 풍취를 흠뻑 전한다. 절을 휘감은 시내는 마곡사를 남원과 북원 두 영역으로 나눈다. 해탈문과 천왕문을 지나 시내 위에 놓인 극락교를 지나면 마곡사의 중심 영역인 오층석탑, 대광보전과 대웅보전이 있는 북원이고, 다리를 건너기 전 해탈문과 천왕문 왼쪽에 자리한 영산전을 중심으로 강당과 요사, 명부전, 국사당이 있는 공간이 남원이다. 극락교를 건너지 않고 길을 따라 서쪽으로 들어가면 남북원과 별도로 최근 유행인 템플스테이를 위한 공간이 있다. 사찰 답사는 그 절의 중심 영역을 먼저 보는 것이 좋다. 
  좌우에 금강역사가 지키고 있는 해탈문을 지나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신 수미산의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과 서쪽을 지키는 광목천왕,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이 두 눈을 부릅뜨고 좌우에 서있는 천왕문이 있다. 이 해탈문과 천왕문 사이 남원의 담장 밑에는 마곡사를 찾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염원을 담은 작은 돌탑들이 널려 있다. 길을 가던 사람들 중 몇몇은 바닥에 쪼그려 앉아 넘어져 뒹구는 돌을 주워 새로운 탑을 세운다. 비록 작고 보잘 것 없는 탑이지만 그 속에는 가족의 건강, 아이의 합격,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하길 바라는 염원으로 담겨 있어 결코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사천왕이 지키는 곳이 수미산이니 천왕문을 지나면 곧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신 불국토이다. 북원의 대광보전과 대웅보전은 비로자나 부처님과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로 모시는 공간이니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아미타 부처님을 만날 수 없다. 따라서 천왕문에서 북원으로 가는 길에 놓인 다리 이름을 극락교라 지은 것은 교리에 맞지 않다. 아마도 중생들에게 부처님이 계신 곳이 극락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에 다리 이름을 그렇게 지었을 수 있다. 
 북원의 중정인 대광보전(보물 802호) 앞마당에는 오층석탑(보물 799호)이 세워져 있다. 이 오층석탑은 받침돌과 오층의 몸돌이 지닌 왜소한 비례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다른 탑들과 거의 차이가 없다. 하지만 몸돌 위 상륜부에는 일반 탑들과 달리 금속으로 된 라마교식 탑이 얹어져 있다. 이러한 청동으로 만들어진 라마교식 탑을 풍마동(風磨銅)이라 하는데 인도에서 유래한 것으로 라마교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이 탑이 고려가 원나라의 영향을 받던 고려 말기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탑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상징하는 것이므로 대개 대웅전 앞에 세워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탑 뒤에 놓인 주불전은 대광보전으로 비로자나 부처님을 모신 불당이니 의아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마곡사의 불당들은 임진왜란 때 절의 건물이 대부분 소실된 후 17세기 이후에 중창된 것이다 보니 고려시대 마곡사의 모습이 현재의 모습과 같다고 볼 수 없다. 고려시대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법당이 이 오층석탑 뒤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현재의 대광보전에 대한 기록은 1851년에 쓰인 「사적입안」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에 따르면, 1782년(정조 6)에 마곡사에 큰 불이 나서 대법당을 비롯해 1,050여 칸이 소실되었고, 대광보전은 1785년부터 새로 지어져 1788년에 단청까지 마쳤다고 한다. ‘대광보전’이라는 현판은 화가 김홍도의 스승으로 알려진 표암 강세황(1712~1791)이 쓴 것이니 그의 생몰연대와 대광보전 중수 시기가 맞아 떨어진다. 

대광보전 후불벽 백의관음도(19세기)


 대광보전은 북원의 중심 불전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직사각형 건물이다. 특이한 점은 대부분의 불단이 건물 안쪽의 긴 면에 만들어지는데 대광보전에서는 남향한 건물의 좌측, 즉 서쪽으로 두 번째 칸에 불단을 조성하고 불단 뒤에 공간을 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렇게 불단을 측면에 배치한 건물로는 부석사 무량수전, 통도사 영산전 등이 있는데, 부석사 무량수전의 경우 주불인 아미타불이 서방정토에 계신 부처님이므로 서쪽에 모셨고, 통도사 영산전인 경우는 통도사 대웅전 뒤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을 향해 앉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마곡사의 경우는 비로자나 부처님을 모신 공간이니 방위와는 무관하다. 아마 불단 앞에 내부 기둥에 방해 없는 큰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이러한 공간 배치를 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불단에 모셔진 비로자나 부처님은 자장율사가 귀국할 때 당나라 왕으로부터 받은 인도의 향단목으로 만들었다는 얘기가 전하고 있지만 원만한 모습과 자세에서 조선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불상들과 유사하다. 불상 뒤에 걸린 화려한 후불탱화는 1788년에 그려진 불화로 비로자나 부처님이 아닌 석가모니 부처님을 그린 탱화이다. 기록에 전하는 대광보전의 단청을 마친 해가 1788년이니 당시 불사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왜 비로자나 부처님을 그린 불화가 아닌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다. 아마도 임진왜란 이후에 재건된 대부분의 주불전이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이라는 점에서 조선시대에 널리 신앙된 법화신앙의 영향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후불탱화가 걸린 뒤쪽 벽은 대개의 경우 진흙을 바른 토벽이거나 판재를 마감한 판벽인 경우가 많은데 이 대광보전의 후불벽은 특이하게 종이를 여러 겹 발라 마감한 종이벽이다. 종이벽의 전면에는 후불탱화를 걸었고, 그 뒷면에 자비를 상징하는 보살 중에 가장 인기 있는 관세음보살상을 그렸다. 백의를 걸치고 바위에 앉은 관세음보살 앞에 작게 선재동자가 그려져 있다. 선재동자가 선지식을 찾아다니다 관세음보살을 만나는 장면은 『화엄경』 「입법계품」의 내용이니 화엄경의 교주인 비로자나 부처님을 모신 대광보전의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 그림은 선명도나 양식적인 특징으로 보아 19세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1844년에 화재로 건물 일부가 소실되었다고 전하는데 그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본다.
 마곡사 대광보전에 가면 예불을 드리고 난 후 불당 안팎을 둘러보며 화려한 불화들을 감상하는 즐거움을 갖자. 알면 보이고, 보이면 사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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