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금순 박사가 바라본 제주4.3 본원사와 단산사
상태바
한금순 박사가 바라본 제주4.3 본원사와 단산사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11.07 15: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3 70주년 맞아 제주불교 4.3흔적 바로 세우기<14>

제주4.3 당시 불교의 수난은 제주 사회 현안에 깊숙이 참여했기 때문에 그 피해도 컸다. 승려들의 인명 피해는 물론이고 관음사 등 사찰들이 제주4.3의 격전지로 수난을 당했다. 
이에 본지는 제주4.3으로 피해를 입은 40여 사찰은 물론 16명의 순교한 스님들의 업적을 재조사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4.3 당시 불교의 역할과 수난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4.3의 정의로운 해결에 첫 디딤돌을 놓고자 한다. <편집자주>

 

 

오랫동안 방치됐던 본원사는 1995년 다시 중건했다.

경찰 가족이라 법당 한 귀퉁이만 불에 타… 

조천읍 함덕리 한국불교태고종 사찰이다. 본원사는 1937년 3월 16일 김원종 스님이 정토진종 대곡파 포교당으로 창건하였다. 제주4․3사건 당시는 25평 규모의 초가 법당과 요사, 종각이 있었다.
1948년 5․10총선거 당시 함덕리 마을 주민들은 함덕의 산 위 중산간 마을인 대흘리 지경으로 피신하여 5․10총선거를 거부했다. 1947년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가 결정되고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이 구성되었다. 북한 지역은 총선거를 할 수 없게 되면서 남한에서만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하였다. 선거 거부는 해방으로 새로운 조국건설을 희망하였는데 남북이 나뉜 반쪽짜리 총선거를 거부하는 움직임이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5․10총선거 거부로 전국에서 유일하게 제주도 선거구 2개가 선거무효가 되었다. 
1948년 5월 13일 오후 4시경 무장대가 함덕지서를 습격하여 지서를 불태웠다. 경찰 7명과 주민 3명 등이 사망하고 가옥 3채가 불타기도 하였다. 이후 함덕에는 대대본부가 설치되었고, 함덕 서우봉 등지 곳곳에서 군인에 의한 학살이 자행되기도 하는 등으로 많은 피해를 입은 마을이다.
본원사는 함덕 지서 인근에 위치해 있었다. 당시 본원사 주지 김원종 스님의 아들인 김병택은 당시 외도지서 주임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알고 있던 무장대는 본원사를 지목하여 불을 놓았다. 그러나 법당 한 귀퉁이만 불에 타고 끌 수 있었다. 경찰 가족이었던 본원사 식구들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제주성내로 피신해 있어 사찰 내에 거주하는 사람은 없었다.
김병택은 이후 제주비상경비사령부 산하 특별수사대 제 1반장을 역임하기도 한 인물이다. 이러한 김병택의 활동으로 함덕리 마을 사람들이 후환을 두려워하여 법당 재건에 힘을 쏟았다고도 증언한다. 본원사는 그 후로도 몇 차례 더 무장대에 의해 방화되었다. 그러나 큰 피해는 없었다. 1948년 8월경에는 무장대가 불상과 불구를 은신처 동굴로 가져다 모셔놓고 예불을 드렸다고도 한다. 
본원사는 1951년경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중수하였다. 그러나 사찰을 제대로 돌보는 이가 없이 방치되다가, 1987년에 대웅전을 중건하고, 1995년에 다시 중건하였다.

 

단산사 입구전경

민족불교 수립코자 했던 스님 경찰에 끌려가…  

서귀포시 대정읍 인성리 단산 기슭에 있는 한국불교 태고종 소속 사찰이다. 단산사는 1941년 11월 20일에 위봉사 인성포교소로 창건되었다. 1943년 6월 8일 포교규칙 제9조에 의해 백양사포교소로 변경되었다. 초대주지는 강대호 스님이다. 
1948년 제주4․3사건 당시 단산사 주지인 강기규 스님은 단산에 올라가 불을 켜 연락을 취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고, 경찰에 끌려가 마을 안에서 총살당하였다. 젊은 나이였던 것으로 증언된다. 단산사는 소개되어 불상은 서림의 대원사로 옮겨갔고, 단산사는 더 이상 사찰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후에 노보살님이 돌아와 절을 다시 운영하였다.
강기규 스님은 제주4․3사건 당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강기규 스님은 이일선 스님의 상좌였다. 당대 제주불교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던 이일선 스님이 단산사에 머무르기도 하였다. 민주주의민족전선제주위원회 공동의장이기도 했던 이일선 스님은 제주시는 물론이고 대정 등 제주도를 일주하면서 대중강연을 했다고 증언되고 있다. 강연 때마다 청중이 뜨겁게 호응했다고 한다.
강기규 스님은 1945년 제주도 불교청년단 집행부의 선전부 활동을 했다. 해방으로 조선불교혁신준비위원회가 결성되어 새 시대의 민족불교를 수립하기 위한 활동에 들어갔다. 1945년 9월 21일 서울에서 불교청년단이 조직되어 지방에 각 지부를 두게 되었고, 이에 따라 제주도에서도 불교청년단이 결성되었다. 제주도 대각사의 원문상 스님이 상경하여 중앙불교의 취지에 동감하고 그와 연계한 제주불교 활동계획을 제안하여 불교청년을 모아 조선불교혁신제주불교청년단대회를 개최하였다. 불교청년단은 건국정신을 뒷받침하며 친일불교를 청산하고 전통불교의 수행정신을 좇으려 활동하였다. 불교청년단은 고기호 스님, 원인상 스님, 백인수 스님 등 35명의 회원을 두었다. 원문상 스님, 고정선 스님, 백인수 스님 등이 모두 강기규 스님처럼 제주4․3사건으로 희생된 불교청년단 스님들이다. 이들은 모두 이일선 스님과 함께 활동하였던 점도 공통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