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강(霜降)- 가을의 중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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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강(霜降)- 가을의 중턱에서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11.13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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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나는 수필
김용길 시인(혜향문학회 편집위원)

하늘은 높아지고, 저 멀리 바다 위 섬들이 맑게 보이며 발밑으로는 어느새 붉게 물들다 지친 낙엽들이 드러눕는 가을의 중턱에 이르렀다. 으슬으슬 차가운 기운이 밤을 가득 채워 아침에 일어나 보면 창가에 서리가 내려앉을 즈음이다. 
10월24일 상강이였다. 상강은 음력 9월에 드는 24절기의 하나로서 말 그대로 서리가 내리는 시기를 뜻하는 절기이다. 상강은 한로와 입동 사이에 들며, 가을의 쾌청한 날씨가 계속되는 대신에 밤의 기온이 매우 낮아지는 때이다. 조선 명종~선조대의 학자이며, 문신인 권문해(1534~1591)가 쓴 흔히 ‘초간일기(草澗日記)’라 불리는 자필일기에 상강의 풍경을 다음처럼 서술해 놓았다. 
“한밤중에 된서리가 팔방에 두루 내리니, 숙연히 천지가 한번 깨끗해지네, 바라보는 가운데 점점 산 모양이 파리해 보이고, 구름 끝에 처음 놀란 기러기가 나란히 가로질러 가네. 시냇가의 쇠잔한 버들은 잎에 병이 들어 시드는데, 울타리 아래에 이슬이 내려 찬 꽃부리가 빛나네. (권문해의 ‘초간선생문집’)”
상강이 다가오면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면 하룻밤 새 들판이 바뀐다. 된서리 한방에 푸르던 잎들이 홀딱 데쳐진 듯 누렇게 바뀐다. 산에 칡잎은 사그라지고, 나뭇잎은 단풍이 든다. 들에 여름작물들도 모두 지고 여름풀마저 사라지는데. 그걸로 끝이 아니다. 그 자리에 겨울 풀이 하나둘 돋아나기 시작한다. 
이때가 단풍이 절정에 이르며 국화도 활짝 피는 늦가을의 계절이다. 중구일과 같이 국화주를 마시며 가을 나들이를 하는 이유도 이런 계절적 사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상강에 국가의례인 둑제를 행하기도 했다. 
둑제란 조선시대 군대를 출동시킬 때 군령권(軍令權)을 상징하는 둑, 그러니까 군대의 대장 앞에 세우는 군기(軍旗)에 지내는 국가 제사를 의미하며, 경칩(驚蟄, 음력 2월)과 상강일(霜降日, 음력 9월)에 병조판서가 주관하여 제사를 지낸다. 
상강하면 말 그대로 서리 내린다는 의미이다. 
서리는 춥고 맑은 새벽, 땅 표면이 냉각되어 온도가 내려감에 따라 발생한다. 즉, 영도 이하의 온도에서 공기 중의 수증기가 땅에 접촉하여 얼어붙은 매우 작은 얼음이다. 서리의 결정형태는 눈의 결정형태와 같다. 서리 내린 날은 오히려 따뜻하다. 서리는 맑고 바람이 없는 날에 내린다. 맑고 춥더라도 바람이 강하면 수증기를 쓸어가기 때문에 서리는 생기지 않는다. 맑고 바람이 없는 날은 햇볕도 많이 내리쬐고 따뜻해진 지표면의 공기도 날아가 버리지 않아 따뜻하다. 
서리에도 이름이 있다. 늦가을에 처음 내리는 묽은 서리는 무서리, 세게 내리는 서리는 된 서리다, 서리가 내리지 않는 기간은 무상(無霜)기간이라고 부른다. 늦은 봄의 마지막 서리가 내린 때부터 초가을 첫 서리가 내릴 때까지의 기간이다. 무상기간은 농업에 중요한 인자가 된다. 작물 재배 가능기간의 한계로 이용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무상기간은 개마고원 지대가 120일로 가장 짧고 제주도가 275일로 가장 길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차밭이 제주도와 남해안에 집중되어 있는 것도 그곳이 북쪽 지방에 비하여 서리가 내리는 날이 적기 때문이다. 
새벽잠이 부쩍 적어진 요즈음 마당에 나아가 소일거리 삼아 화단을 들러보는데 여기저기 서리가 내려앉기 시작한 것 같아 또 미리 다가올 겨울의 추위가 걱정된다. 세월은 그렇게 무심하게 흘러가거늘, 자잘한 걱정거리들이 무어 이리 많은 지 머리에 흰 서리가 더 느는 듯하다. 서리가 내린 날은 따뜻하여지는 것처럼, 인생의 뒤안길에서 좀더 여유를 갖고 따뜻한 생각들을 꽃 피워낼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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