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공주 태화산 마곡사(麻谷寺)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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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공주 태화산 마곡사(麻谷寺) (4)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11.13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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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사찰순례(73)
마곡사 대웅보전

 조선시대에는 불화를 그리는 화승(畵僧)을 화원(畵員), 화사(畵師), 용면(龍眠), 화공(畵工), 경화(敬畵), 편수(片手), 금어(金魚)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다. 오늘날에는 불모(佛母)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후기에 그려진 불화 하단에 그 그림이 그려진 때와 불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적은 화기에 가장 많이 쓰인 호칭은 금어, 편수, 화원이다. 금어는 단독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금어, 편수 또는 화원이 순차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있어서 금어는 화승을 가리키는 용어이면서 화승들 중 가장 상급자를 가리키는 호칭이기도 했다. ‘금어’라는 단어는 한자의 의미로 보면 ‘금으로 된 물고기’를 가리킨다. 이 호칭은 부처님께서 극락에 있는 연못에 금어가 없는 것을 보고 현세에 부처님을 묘사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세에 극락의 금어로 환생시켜 주겠다고 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마곡사의 말사인 신안사(身安寺) 석가모니후불도의 화기를 예로 들어 보면, 제작된 해와 봉안 장소 및 증명한 스님들 이름 다음에 불화를 그린 화승들의 이름을 ‘金魚 錦湖若效 片手兼出草 普應文性 比丘定淵 千午 夢華 大炯 一悟 性曄 大興’라고 기록되었다. 이 내용은 금호당 약효스님이 금어로 불화 제작의 중심인물이며, 그 다음으로 중요한 이가 밑그림인 초를 낸 보응문성이며, 이들 두 사람 외에 정연, 천오, 몽화, 대형, 일오, 성엽, 대흥 등 일곱 명의 비구가 참여해서 그림을 그렸다는 의미이다.    
 마곡사는 조선시대 말기와 일제강점기 동안에 유명한 불화를 그리는 화원들이 활동한 중심 사찰 중 한 곳이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파괴된 절집들을 만들어졌고 그 절집을 화려하게 장식할 불화도 많이 그려졌다. 이처럼 수요가 많다보니 각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화원집단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금강산 유점사, 양산 통도사, 여수 흥국사, 남양주 흥국사 등이 그러한 화원 집단들이 중심이 되어 모였던 사찰이다. 마곡사도 조선시대 말기에서 20세기초반까지 계룡산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전국적으로 활동한 유명한 화원들을 배출한 곳이다. 그 시작은 위에서 예로 든 화기에 금어로 이름이 올라간  금호약효(錦湖 若效, 1846-1928)가 마곡사를 중심으로 충청도 일대에서 활동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의 문하에서 보응문성(普應文性, 1867-1954), 호은정연(湖隱定淵, 1882-1954), 춘화만총(春花萬聰) 등 쟁쟁한 제자들이 나왔고, 보응문성에게서 금용일섭(金蓉日燮, 1901-1975)으로, 다시 금용일섭에서 중요무형문화재(인간문화재) 불화장(佛畵匠)이었던 해봉석정(海峰石鼎, 1928-2012)으로 이어져 조선시대 전통 불화의 맥이 오늘날까지 연연히 이어지게 되었다. 특히 금용일섭은 1940년에 제주도를 방문해서 삼양 원당사를 비롯한 여러 곳의 불화를 그렸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어 제주도와도 관련이 있는 분이다. 

근대 불화에 큰 영향력을 끼친 금호당 약효가 중심이 되어 그린 마곡사 대웅보전 석가모니후불탱화 1905년


 현재 마곡사에 전하고 있는 불화와 벽화는 안타깝게도 마곡사의 유구한 역사와 맥을 같이 하지 않는다. 임진왜란 등 전란과 사찰에 빈번한 화재 때문이다. 가장 오래된 것은 사찰 야외 법회 때 거는 석가모니괘불도로 1687년에 제작된 것이다. 대광보전에 봉안된 석가모니후불도와 삼장보살도는 그보다 100년 뒤인 1788년에 그려졌다. 대광보전의 칠성도 및 백의관음벽화는 19세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불화들이 마곡사에 전하는 불화 중 오래된 것들이고 나머지 불화들은 20세기에 들어서 금호약효 스님과 그의 제자가 주도하여 그린 것들이다. 대웅보전 삼세불도(1905), 대웅보전 신중도(1910), 영산전 신중도(1910), 심검당 석가모니후불도(1924), 심검당 신중도(1924), 대광보전 신중도(1924) 등이 그것이다. 석정 스님이 전하는 약효 스님의 일화에 따르면, 약효 스님은 불사가 끝나면 참여한 화승들의 우열을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보수를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이를 보고 어떤 스님이 묻기를 “누구는 재주도 있고 손도 빨라서 많은 양의 일을 짧은 시간에 해내고, 누구는 재주도 없고 손이 더디어서 오래 일을 해도 자리가 나지 않는데, 왜 똑같이 보수를 나눕니까?”하니 스님은 “못하는 사람이 애는 더 쓴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또한 약효 스님은 불사로 받은 수입으로 전답을 사서 사찰에 헌납했는데, 한번은 스님의 논을 부치는 소작인이 3년 동안 소작료를 내지 못하자, 어떤 농부가 그 논을 자기에게 주면 소작료를 빠지지 않고 내겠다고 하자 스님은 그의 등을 어루만지며 “그 사람이 얼마나 어려우면 3년이나 소작료를 못 내었겠는가? 다음에 논을 사면 자네에게 주겠네”라고 하고 그 약속을 지켰다고 한다. 스님이 장례식 때는 스님에게 신세를 진 사람들이 온 산을 하얗게 덮었다고 한다. 마곡사 대웅보전 중수 및 심검당 기와 불사, 천왕문과 해탈문 중수 등에 참여한 대시주자였던 스님의 공덕을 기려 마곡사에서는 그의 진영(초상화)을 모시고 있다. 그리고 마곡사에는 전국에서 유일한 불모비림(佛母碑林)을 조성하여 금호 스님을 비롯하여 보응, 정연, 일섭, 회응, 우일 등 화승들의 행적을 적은 비석을 세워 기리고 있다.
 마곡사 대웅보전(보물 제801호)은 건립 당시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한 용도인 대장전(大藏殿)으로 지어졌지만 1785년에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으로 바뀌었다. 바뀐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현재는 중앙에 석가모니불,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불 삼세불을 모셨고, 각 불상 뒤에는 그 부처님을 상징하는 불화를 봉안하였다. 이들 세 불화는 비단 바탕에 가로 285㎝, 세로 411㎝의 크기로 1905년에 그려졌다. 석가모니불화는 금호약효가 중심이 되어 그렸고, 약사불화는 그의 제자인 문성(文性)이, 아미타불화는 정연(定淵)이 주도하여 그렸다. 석가모니불화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아래 좌측에 문수보살과 관세음보살을, 우측에 보현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배치하고, 그 위에 미륵보살, 지장보살 및 범천, 제석천, 10대 제자 등을 따스한 황토색과 녹색과 적색을 주로 사용하여 화려하면서도 기품 있게 그렸다. 심검당에 있는 석가모니후불도는 20여 년 뒤에 약효를 중심으로 거의 동일한 화승들이 참여하여 그린 불화이다. 이 두 불화를 비교하여 보는 것도 답사의 또 다른 즐거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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