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출가를 허락한 곳 바이샬리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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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출가를 허락한 곳 바이샬리에 가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11.14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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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고행 - 인도 불교 성지를 중심으로 ⑩/오영호 시인

순례객들은 부처님께서 이모 마하프라자바티와 아난다의 간곡한 청으로 여성출가를 허락해 불교교단이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사부대중이 완성을 보게 된 곳 바이샬리 성지를 찾았다. 아소카 석주가 가장 원형대로 남아있는 곳이기도 한 이곳에서 부처님께서는 계급타파와 인간해방을 이루기 위해 가장 앞장섰던 분이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편집자주>

 

바이샬리 성지

성지로 들어가는 길가에 리치가 주렁주렁 달린 리치나무를 처음으로 봤다. 껍질을 벗겨 하얀 살을 먹으면 달콤하다. 이번 여행에서 리치도 실컷 먹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부처님은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 반기를 들었다. 모든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듯 삶과 세상의 이치에 대해서도 혁명적이셨다. 그 중에 당시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했던 여성의 출가를 허락하셨다는 점에서 어쩌면 파격적인 여성 해방을 이루신 분이시다.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 바이샬리 성지다. 깨달음을 얻은 후 6년째 되던 해, 부처님께서는 카필라성에서 아버지 숫도다나왕의 장례식을 치르고 돌아오는 길에 그를 키워준 이모 마하프라자파티를 만났다. 그녀는 출가를 간청하지만 당시의 전통과 문화 속에서 여성의 출가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하프라자파티는 포기하지 않고, 궁중에서 500명의 여인들을 데리고 찾아와 다시 간곡히 부탁을 드렸다고 한다. 이것을 본 제자 아난다가 부처님께 간절히 간청하고 결국 ‘8경법’을 조건으로 여성 출가를 허락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여기에는 아난다를 기리는 아난다 스투파가 자리하고 있다. 한마디로 남녀 차별을 없애버린 것이다. 최초의 비구니 승단이 탄생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을 교단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아난다 스투파를 돌면서 부처님을 생각하는 순례객들의 모습.

또한 일상에서 만나는 재가여성에게도 자상하게 가르침을 전하셨다.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혁명적인 발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로써 불교 교단은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사부대중 (四部大衆)이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아소카 석주가 있다. 현재 남아있는 것 가운데 가장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부처님의 말씀을 가장 많이 들은 ‘다문제일(多聞第一)’ 아난다는 경전의 결집에서 핵심 역할을 했고, 부처님 사후 마하가섭을 이어 교단의 수장이 됐다. 이런 아난다를 아소카왕도 존경했다. 왕은 사리불과 목건련, 마하가섭의 부도에는 10만 냥을 공양했으나 아난다에게는 100만 냥을 공양했다고 한다. 유적을 설명하는 안내판에는 이 탑이 “원숭이 왕이 붓다에게 꿀을 바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석주가 세워졌다”라고 쓰여 있다. 500여 개의 발우를 한 줄로 놓아두면 신도들이 음식을 나누어 주었는데, 원숭이가 그 많은 발우 중에서 부처님 것을 골라내어 꿀을 가득히 채워 부처님께 공양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수백 마리의 원숭이들이 땅을 파 부처님이 목욕할 수 있도록 연못도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저런 이야기에 혜전 스님과 경수 스님의 눈자위도 붉어졌다. 비구니로서 한평생을 살아오면서 어찌 회한이 없겠는가. 아난다 스투파를 돌며 오로지 부처님의 거룩한 가르침에 의지하며 당당히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가리라는 다짐에 다짐을 하며 걷고 있으리라. 그 숭고한 모습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아무튼 2500여 년 전 부처님의 발자취를 찾아 가는 인연이야말로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부처님이 머물렀던 성지를 직접 찾아가서 보고 들으면서 그 때를 상상해본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내 인생의 가장 큰 가피인 것이다.  
나오다 보니 망고나무들이 줄지어 있다. 망고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모두들 모여 기념사진을 찍는다. 입구를 나오자 가이드는 들어갈 때 보았던 나무에 달려 있던 리치를 한 묶음 사서 몇 줄씩 나눠준다. 싱싱한 리치의 맛을 봤다.  

아소카 석주와 아난다 스투파의 모습.


아무리 신심을 고취하는 성지순례라 해도, 여름 인도여행은 만만하지는 않다. 날씨 탓도 있지만, 도로 사정도 좋지 않은데다 하루 7~8 시간을 버스를 타야하는 빽빽한 일정이 한몫을 했다. 릭나우에서 아그라로 돌아올 때는 무려 11시간이나 걸렸다. 또한 고급 호텔이라는 곳도 에어컨 작동이 시원치 않은 곳도 있었다. 덕분에 그만 코감기를 걸리고 말았다. 콧물과 재채기가 심했다. 그렇지만 스님을 비롯한 여러 분들의 도움으로 별 탈 없이 동행할 수 있었다. 
  
여행 중엔 특히 식사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건강의 바로미터가 되기 때문이다. 음식은 문제가 없었다. 북인도 지역에선 한국 요리를 배운 인도요리사가 우리가 식사할 곳으로 먼저 가서 요리를 해 놓았다. 특히 전기밥솥으로 한국 쌀로 밥을 해서 그런지 밥맛이 좋았다. 그리고 된장국을 비롯한 여러 가지 한국식 음식은 만들어 내놓았다. 때문에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미리 여행사에서 많은 배려를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밑반찬과 간식거리를 푸짐하게 준비하고 오신 보살님들 덕분에 식사 시간은 늘 행복했다. 그 고마움은 평생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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