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금순 박사가 바라본 제주4.3 원당사와 극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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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금순 박사가 바라본 제주4.3 원당사와 극락사
  • 특별취재팀
  • 승인 2018.11.21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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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70주년 맞아 제주불교 4.3흔적 바로 세우기<16>

제주4.3 당시 불교의 수난은 제주 사회 현안에 깊숙이 참여했기 때문에 그 피해도 컸다. 승려들의 인명 피해는 물론이고 관음사 등 사찰들이 제주4.3의 격전지로 수난을 당했다. 
이에 본지는 제주4.3으로 피해를 입은 40여 사찰은 물론 16명의 순교한 스님들의 업적을 재조사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4.3 당시 불교의 역할과 수난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4.3의 정의로운 해결에 첫 디딤돌을 놓고자 한다. <편집자주>

 

원당사 현재 모습

 

“원당사, 대웅전 보전했지만 폐허나 다름없어”

 

제주시 삼양1동 한국불교태고종 사찰이다. 원당사는 삼양의 원당봉에 불탑사와 마주보고 있다. 원당사는 1924년 하시율 스님이 백양사 제주포교소로 창건하였다. 1936년 송재술 스님이 1936년 목조로 대웅전과 해탈문을 완공하였다. 1937년 제주도 법화산림 대작불사가 원당사에서 있었다. 이성봉 스님이 전도 중요 사찰에서 법화경을 배포하고 불사를 진행하였다. 
원당사는 제주4.3사건으로 1949년 11월 삼양리 마을로 소개되었다. 그 와중에도 대웅전을 보존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당시 신도 중에 경찰이 있어서 원당사를 보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56년에야 피난 생활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원당사는 폐허나 다름없었다. 도명 스님이 소개되었던 부처님과 탱화 등을 모시고 돌아와 대웅전과 객실을 보수하고 재건하였다. 당시 봉안하고 있던 산신탱화는 지금 제주대학교 박물관에 기증되어 있다.

삼양리는 제주4.3사건 내내 무장대와 토벌대가 서로에 대한 보복으로 서로를 공격하여 많은 희생이 생긴 마을이다. 무장대는 삼양지서를 목적으로 습격하고 경찰은 이에 대한 보복을 삼양 주민들에게 하면서 많은 희생이 발생했다. 
 삼양지서에 근무하던 경찰은 서북청년단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서북청년단 제주도지부가 1947년 11월 2일 결성되었다. 이승만대통령이 공식적으로 혹은 비공식적으로 서북청년단원들을 경찰로 만들었다. 서북청년단은 좌익 소탕을 구실로 갖은 폭력과 살인을 저질렀다. 1947년 제주도 식량사무소장 박태훈을 습격하는 등으로 여러 테러행위를 일삼았다. 1947년 11월 18일 제주 CIC의 보고에 의하면 서북청년회 지도자가 제주도에서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광범위한 테러행위를 하다 CIC에 사과하기도 했다. 또한 서북청년회 제주도단장이 ‘제주도는 조선의 작은 모스크바’라고 말해 왔다고 제주 CIC가 상부에 보고하기도 하였다. 서북청년단은 제주도에서도 우익을 대변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테러활동을 일삼았다. 그 중 경위로 특채된 서북청년단원 삼양지서 주임 정용철은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며 악명을 날렸다. 
 

 

극락사 현재 모습

 

“극락사, 1948년 토벌대에 의해 불태워져” 

 

극락사는 애월읍 상귀리 한국불교태고종 제주교구 사찰이다. 극락사는 금덕리 극락봉에 1928년 변덕립 스님이 창건하였다. 1929년 9월 위봉사 제주도포교소로 신고하였다. 30평 기와 법당과 요사채를 구비하고 있었다.
극락사는 1948년 토벌대에 의해 불태워졌다. 1957년부터 재건 노력을 하여 상귀리에 현재 사찰을 지어 극락사를 잇고 있다.

1945년 12월 미소 공동 위원회가 설치되어 한반도에 민주적인 통합 정부를 세우기로 하였으나 쉽게 타협을 보지 못하였다. 한국 문제가 유엔에 상정되고 유엔 총회는 한국에서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하여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을 발족시켰다. 그러나 소련의 거부로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이 북한 지역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되었고, 이에 1948년 5월 10일 이내에 남한에서만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선언하였다. 5.10총선거는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통한 단독정부의 수립을 의미하였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 위원회는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 반대를 내걸고 5·10 선거를 거부하기로 하였다. 무장대는 선거 관리 사무소나 선거 관리 위원을 습격 하거나 투표소를 공격하는 등으로 5.10총선거 거부활동을 하였다. 또한 5월 5일경부터는 주민들을 산으로 피신시켰다. 
제주도는 경비대, 경찰, 향보단 등이 동원되어 선거를 독려했다. 그러나 투표결과 전국 최하위의 투표율과 2개 선거구의 무효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북제주군 갑구와 을구는 43%와 46%의 투표율로 과반수 미달로 선거무효가 되었다. 이후 제주는 계속되는 군과 응원경찰의 육지부로부터의 투입으로 무자비한 세월을 맞이하게 되었다.

5.10총선거 시기 금덕리 극락사는 아랫마을인 금악, 상귀, 하귀, 수산 등의 애월읍 마을에서 올라온 주민들의 피신처가 되었다. 당시 극락사에는 5~6명 가량의 스님이 상주하고 있었으며, 선거를 거부하고 올라온 주민들이 약 80여 세대에 달했다. 애월읍 수산리 수산사도 이 시기 극락사로 피신하였다. 이러한 극락사의 역할로 토벌대는 극락사 건물을 모두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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