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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금순 박사가 바라본 제주4.3 광룡사.봉주사.월라사4.3 70주년 맞아 제주불교 4.3흔적 바로 세우기<18>
광룡사

 

광룡사 북제주군 한립읍 동명리 한국불교태고종 제주교구 사찰이다.
광룡사는 1945년 3월 한림면 상대리에 김금륜 스님이 창건하였다. 1946년 기와 법당 14평, 1947년 객실 2동 등을 갖추었다.
상대리는 소개령에 의해 해안마을 동명리로 소개되었고, 1948년 11월 29일 광룡사는 토벌대에 의해 모두 파옥되었다. 계속되는 제주4‧3사건 상황의 지속으로 상대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1950년 10월경에 동명리로 이전하였다. 1952년 음력 3월에 법당 재건에 착수하여, 9월에 입주상량 했으며, 1953년 1월에 2간 규모의 기와 법당을 완공하였다. 1958년 현재 위치로 다시 이전하였고, 황룡사로 개명하였다.
한림읍 상대리는 무장대가 활동하던 중산간 지역 지경이었다. 4‧3이전에는 14개동으로 구성된 큰 마을이었으나 제주4‧3으로 토벌대의 초토화작전으로 마을이 초토화되어 3개동만 남아있기도 하다. 마을과 함께 광룡사도 철거되어 동명리로 소개하여야 하였다.

 

봉주사

 

봉주사 남제주군 표선면 토산리 한국불교태고종 제주교구 사찰이다.
봉주사는 김석윤 스님이 창건하였다. 1934년 2월 23일에 4간 규모의 초가 대웅전과 3간의 초가 객실을 건립하여 창건했다. 1936년 10월 5일에 위봉사 표선포교소로 등록하였다. 
봉주사는 1948년 토벌대에 의해 법당과 객사가 철거되었다. 건물을 해체하는 것은 무장대가 이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봉주사는 토산리 주민들과 함께 토산 2리로 소개되었다. 소개하면서 토벌대는 법당과 객실 등 건물 일체를 철거하였다. 불상과 탱화는 인근 대나무 밭에 움막으로 싸서 숨기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 불상들은 훼손되어 전해 오는 것은 없다.  
1949년 5월 18일, 4간의 법당과 초가 객실이 새로 건축되기 시작하였다. 1966년에 재건추진위원회가 발족하면서 사명을 봉림사로 개명하였다. 다시 영천사로 개명하였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토산리는 해변 마을로 소개령 지역 즉 해안에서 5Km 이상 위의 지역에 해당하지 않는 마을이었다. 그러나 토산 1리 주민들을 토산 2리로 소개시켰다. 1948년 11월 토산리 위 중산간에서 숨어지내던 남녀 두어 명이 토벌대에 발각되었다. 토벌대는 이들을 총살하면서 임산부는 배를 창으로 찌르고 총을 쏘았다고 한다. 이들을 발견한 이후 토벌대는 주민들을 모두 향사로 집합시켰다. 모여든 주민들을 이리저리 분류하고 나서 그중 200여 명을 표선국민학교로 끌고 갔다. 이들은 표선 백사장에서 집단학살되었다. 이후 12월 토산 1리는 토산 2리로 소개시켰다.
 

 

월라사

 

월라사 서귀포시 신효동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관음사 말사이다.
월라사는 1933년 8월 법주사 신효포교소로 창건하였다. 기와 법당을 갖춘 사찰이었다. 화주 변옥희 친정에서 마련해 준 것이었다. 화주 변옥희의 불교 활동을 인정하여 1942년 본사 법주사에서 포상을 한 기록도 남아있다. 
신효리는 해안가 마을이다. 따라서 소개할 지역도 아니었다. 무장대의 피해도 없는 마을이었다. 그러나 주민 30여 명이 토벌대에 희생되었다. 딱히 죄가 없어도 토벌대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죽이는 시절이었다고 한다.
월라사는 1948년 11월 초토화작전 시기 중 파괴된다. 경찰은 월라사 당우를 파옥하였다. 이는 무장대로 추정되는 사람이 절에 들러 밥을 먹은 게 아니냐고 해서 일어난 일이었다. 이 때 월라사 화주 변옥희 보살과 그의 딸도 경내에서 총살당했다.
월라봉 아래 월라사는 복원하지 못하였다. 1952년 마을의 신도들이 월라사의 뜻을 이어 신효동으로 이주하여 법당과 요사를 짓고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특별취재팀  jejubulgy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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