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산사, 통도사(通度寺)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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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산사, 통도사(通度寺) (2)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12.12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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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사찰순례(75)
통도사 대웅전 꽃창살

불보사찰 통도사는 법보사찰인 해인사, 승보사찰인 송광사와 더불어 삼보사찰이라고 불린다. 통도사를 불보사찰이라 하는 이유는 신라시대에 자장율사가 가지고 온 부처님의 사리를 통도사에 모셨기 때문이다. 양산이 부산과 그리 멀지 않으니 임진왜란 때 물밀 듯이 밀려오는 왜군들이 통도사를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군의 침탈에 진신사리를 어떻게 보존하였을까? 금강계단 옆에 세존비각(世尊碑閣)이라고 쓰인 현판이 걸린 정면 한 칸, 측면 두 칸의 작은 팔작지붕의 건물이 있다. 말 그대로 비석을 모신 건물이다. 건물 안에는 높이 2.5미터, 폭 1미터의 비석이 있는데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밀양 표충비처럼 가끔 땀을 흘린다고 한다. 이 비석의 정식 명칭은 ‘사파교주석가여래영골부도비(娑婆敎主釋迦如來靈骨浮屠碑)’이다. 비석에는 중국에서 자장국사가 석가모니의 사리를 가져온 일과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통도사의 사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둘로 나누어 금강산에 계신 스승 서산대사에게 보냈더니 서산대사께서 하나는 묘향산에, 다른 하나는 현재 통도사 금강계단에 모시라고 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통도사에 보관된 사리의 역사에 대해 전하는 이 짧은 글 속에는 2560여 년의 역사가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금강계단 중앙에 있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석종형 사리탑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국사(590~658년경)는 진골 출신으로 왕의 부름을 거부하고 출가하고 636년(선덕여왕 5)에는 당나라로 공부하러 갔다. 자장 스님이 중국의 청량산(淸凉山)에서 문수보살상을 향해 기도할 때, 문수보살이 나타나 가사 한 벌과 부처님의 발우, 진신사리 100알, 불두골과 사구게를 주며 이르기를 “그대의 나라 남쪽 취서산 기슭에 독룡이 살고 있는 못이 있는데, 그 용들이 비바람을 일으켜 곡식을 상하게 하고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대가 용이 사는 연못에 금강계단을 쌓고 이 불사리와 가사를 봉안하면 삼재(三災)를 면하게 되어 만대에 이르도록 불법이 전하리라”하였다. 당나라의 수도 장안 인근의 종남산에서 수도할 때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자 당나라 황제인 태종이 그를 불러 극진하게 예우하였다고 한다. 643년에 선덕여왕이 당태종에게 그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자 자장은 신라로 귀국하였다. 귀국 후 자장은 문수보살이 이야기한 곳에 찾아가보니 연못에 독룡들이 살고 있고, 설법을 해서 용들을 물러나게 한 뒤 못을 메우고 계단을 쌓았으니 그것이 곧 금강계단이라는 것이다. 통도사 대웅전 옆에는 구룡지라 불리는 작은 연못이 있다. 자장국사의 창건설화에 등장하는 용이 살았다는 연못이다. 용이 살기에는 너무 작아 “에게~” 하고 미소가 절로 나지만 창건설화에 연못을 메웠다고 했으니 메우다 남은 연못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자장국사가 문수보살로부터 받았다는 사리나 가사를 과학적으로 증명해보고 싶다는 상상을 굳이 할 필요는 없다. 아주 특수한 환경이 아니면 자연에서 나오는 직물로 짠 가사가 2500년 넘게 보존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나 안다. 분명한 사실은 적어도 자장 스님이 통도사에 가지고 온 이후 1400년 가까이 수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사리와 가사라고 믿어온 것이다. 그 믿음으로 두텁게 싸인 것을 굳이 벗겨낼 필요는 없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지 2560여 년이 지났지만 말씀으로, 법으로 항상 중생들과 함께 사시고 있기 때문이다. 금강계단 중앙의 종 모양 사리탑에 모셔진 부처님은 그 뒤에 서있는 곧은 소나무처럼 늘 중생들에게 푸르른 생명력과 그늘을 베푸시고 있다. 그것을 받고 못 받는 것은 중생들 개인의 몫이지만. 
 세존비각 뒤쪽으로 개산조당(開山祖堂)과 해장보각(海藏寶閣)이라는 현판을 단 작은 건물이 있다. 개산조당은 해당보각으로 가는 출입문이며, 해장보각 안에는 통도사를 연 자장국사의 진영을 모시고 있다. 건물 이름을 해장보각이라 한 이유는 아마도 자장국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오면서 가지고 온 대장경을 함께 모셨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 것 같다. 당시 가지고 온 대장경은 아니지만 함께 모셔졌던 불경들은 모두 박물관으로 이전 보관하고 있다.         
 현재 통도사에 있는 건물들은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18세기 초반과 후반에 대규모의 불사가 있었고, 오늘날 모습의 대부분은 그 때 완성된 형태라고 보아도 될 듯하다. 대웅전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지난 인조 19년(1641)부터 지어지기 시작하여 인조 23년(1645)에 완성되었다. 자장 스님에 의해 통도사가 창건된 이후 여러 차례 중창되며 내려오다가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에 타 다시 지어진 것이다. 건물의 외형도 특이하지만 금강계단이 있는 북쪽에는 적멸보궁(寂滅寶宮), 남쪽에는 금강계단(金剛戒壇), 동쪽은 대웅전(大雄殿), 서쪽에는 대방광전(大方廣殿)이라는 현판이 네 개나 걸려 있고, 세 곳으로 들어 갈 수 있어 처음 보는 분들은 당황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뜻은 알면 고개가 절로 끄덕거려질 것이다. 적멸보궁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곳이라는 뜻이고, 금강계단은 깨지지 않는 금강석처럼 계율을 지킨다는 의미이며,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모신 전각이고, 대방광전은 그곳이 진리이자 우주의 본체인 법신불이 계신 곳이라는 의미에서 네 곳에 현판을 단 것이다. 대웅전과 금강계단을 둘러보거나 대웅전에서 예불이나 참선한 후 그곳을 그냥 떠나지 말고 보아야 할 것이 있으니 바로 꽃창살과 대웅전 돌계단의 소맷돌이다. 부처님이 계신 곳은 임금이 있는 곳처럼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절집에서 사용할 수 있는 건축 재료가 나무와 돌이다 보니 그것으로 뭘 어떻게 장식하겠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우리 선조 장인들은 때로는 소박하게, 때로는 대담하게 나름 맘껏 솜씨를 발휘하였다. 비록 화려했던 색은 희미해졌지만 마름모 모양의 격자빗살창에 갖가지 꽃무늬 모양을 붙인 꽃창살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난다. 이러한 감각은 계단 옆의 빈 면을 둥근 꽃을 피워 올린 줄기와 잎을 조각한 데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오후에 통도사를 찾았으면 좀 더 기다렸다가 저녁 예불 전에 범종각에서 거행되는 예불을 알리는 소리공양의식을 반드시 보길 권한다. 스님들의 공연을 보노라면 눈과 정신뿐만 아니라 귀도 밝아질 것이다. 오래된 산사에는 곳곳에 이런 아름다움이 숨어있다. 산사에 가면 곳곳에 숨겨진 조상들의 미적 감각을 숨은그림찾기처럼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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