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향” 권두 에세이 - 가을 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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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향” 권두 에세이 - 가을 나그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12.19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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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철 회장<혜향문학회 명예회장>

그 무덥던 여름을 밀어내고 선선한 가을이 찾아왔다. 천지를 사를 듯 기승을 부리던 불더위는 어디로 갔을까?
소슬바람이 바다 건너오고, 흰 구름은 쪽빛 하늘에 유유히 흐른다. 소슬바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흰 구름은 또 어디로 가는 것인가. 바람도 구름도 인연 따라 오가며 가을을 싣고 와 부려놓고 간다. 
이렇게 시원할 수가 있을까. 이렇게 상쾌할 수가 있을까. 마음도 몸도 날을 듯 가볍다. 가을은 여름내 지친 나그네의 몸을 다독이고 있다. 
나그네는 길을 간다. 구비 구비 오솔길을 돌아 저녁노을이 붉게 물든 마을로 들어선다. 나그네의 미소가 아름답다. 
오곡백과 무르익는 풍요로운 마을, 주막에 들러 주모와 객담客談을 나누며 따라주는 곡주 몇 잔을 들이킨다. 세상은 온통 낙원이다. 불콰한 얼굴로 시 한 수 읊조리고 주모는 젓가락 장단으로 흥을 돋운다. 밤이 익숙해지면 객창을 두드리는 달을 안으로 들여 사랑을 속삭인다. 정을 나누던 달이 서산마루에 걸려 사위어지면 아침이 열린다. 나그네는 다시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선다. 그림 같은 인생여로다. 

인생은 여행이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나그네다. ‘내가 지나온 모든 길은 곧 당신에게로 향한 길이었다. 내가 걸어온 수많은 여행은 당신을 찾기 위한 여행이었다. 내가 길을 잃고 헤맬 때조차도 나는 당신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을 발견했을 때 나는 알게 되었다. 당신 역시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잭 캔필드마크 빅터 한센이 한 말이다. 이 글을 읽노라면 인생은 운명의 길을 걸어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 인생이란 주어진 길에서 운명적으로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고 돌아가는 여정이 아니던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만남이다. 만남이 없다면 아무것도 이루어낼 수가 없다. 나의 존재를 생각해보라. 아버지와 어머니,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만남이 없었다면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 뿐인 존재로 태어난 나, 참으로 소중한 존재가 아닌가. 그래서 ‘인생은 너와 나의 만남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만나기 위해 살아가는 인간, 산다는 것은 곧 만남이다. 
어디론가 향해 가는 노정에서 순간순간 누군가를 만나는 인간, 그는 무엇인가를 이루고 되어가는 삶을 살아간다. 부모를 만나고, 형제를 만나고, 친구를 만나고, 스승을 만나고…, 만남은 즐거워야 한다. 행복해야 한다. 만남이 행복하지 않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울 것인가. 
행복한 만남의 시작은 무엇일까. 나를 사랑하는 일이다.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사랑은 되로 주고 말로 받지만 미움은 몽둥이로 주고 홍두깨로 받는다. 
이 가을 스스로 나에게 물어보라. 얼마나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말이다. 얼마나 좋은 부모였는가, 얼마나 좋은 형제였는가, 얼마나 좋은 친구였는가, 얼마나 좋은 이웃이었는지를 물어볼 일이다. 자신을 돌아보는 것, 그것은 고요한 본성을 찾아 만나는 삶이다. 
나그네여! 길을 가는 동안 사랑의 언덕을 만난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곳에선 오래 머물고 싶었으리라. 미움의 언덕을 만난 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곳에선 어서 빨리 떠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과 미움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 언덕이 그 언덕이다. 그것은 이름이 그러할 뿐 둘이 아니다. 오직 마음이 선택할 뿐이다. 
인생은 이 세상에 올 때 삶과 죽음을 동시에 지고 왔다. 삶과 죽음은 모두 내 것이란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삶을 사랑하면서 죽음은 싫어한다. 주어진 것을 사랑하지 않으면 불행이 찾아온다. 주어진 모든 것을 사랑할 때 행복이 찾아와 미소 짓는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다. 그 마음은 머무름이 없다. 사랑과 미움을 지고 업고 강물처럼 끊임없이 흐른다. 어느 때는 맑고 잔잔하지만, 어느 때는 흙탕물이기도 하고, 소용돌이를 이루기도 한다. 하지만 물의 본성은 맑거나 흐리거나 소용돌이치거나 그런 게 없다. 언제나 맑고 고요하다. 
가을 나그네의 길엔 낙엽이 시나브로 지고 있다. 욕심껏 매달았던 잎을 떨구면 늘어졌던 가지를 바로 세우고 쪽빛 하늘을 향해 팔을 뻗는다. 잎에 파묻혀 휘둘리던 나무는 고요를 찾았다. 구할 게 없으니 편안하리라. 유구개고 무구내락有求皆苦 無求乃樂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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