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려관 스님 1865년 음력 6월14일 화북리에서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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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려관 스님 1865년 음력 6월14일 화북리에서 출생”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12.19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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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당 봉려관 스님의 발자취 세미나 주제발표 논문

근대한국여성의 선구자 해월당 봉려관 스님①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관음사가 주최하고 탐라성보문화원이 주관한 해월당 봉려관 스님의 발자취 세미나에서 전 동국대 선학과 강사 혜달 스님이 주제 발표한“근대한국여성의 선구자-해월당 봉려관 스님”을 본지에서 다시 소개하게 되었다. (단, 지면의 제약으로 각주는 부득이하게 생략해서 실었다.) <편집자주>

 

1. 들어가는 말
제주의 민간신앙은 예로부터 제주인의 생활과 함께해 왔으며, 제주인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이후 여러 종교가 제주에 들어와서도 그 원형을 상실하지 않는 제주인의 신앙 뿌리이다. 
고려시대에는 제주의 광양당을 국사당으로 지정해 국가적 차원에서 민간신앙을 인정하였고, 불교와 민간 신앙은 큰 마찰 없이 절에도 가고 당에도 가는 신앙형태가 형성된다. 
조선시대의 유교적 통치이념은 민간 신앙과 불교를 탄압하였고, 민간신앙과 불교는 축소 또는 퇴락하게 된다. 그 대표적 예(例)가 이형상(李衡祥, 1653-1733) 목사의 신당, 사찰 훼철이다. 
제주불교는 이형상이 제주목사로 부임(1702-1703)하면서 폐사훼불(廢寺毁佛)이 자행되었고, 이로 인해 쇠퇴되었다는 것은 주지(周知)하는 바이다. 당시 사원(寺園) 철폐는 물론 승려활동 및 공식적 불교의례까지도 소멸되었다고 한다. 즉 종교로서의 불교가 말살당한 것이다. 타종교의 대처방식에 따른다면, 이들 사찰들은 모두 근대불교성지로 지정되어야 마땅하고; 이 때 축출된 승려들은 근대제주불교의 성인 반열에 들어야 될 것이다.
후임으로 이희태(李喜泰, 1669-1715)가 제주목사로 부임(1703-1704)하면서 신당은 재건되었고 굿도 허용되는 등 심방의 위상은 회복되고 신앙생활도 계속되었다. 반면 불교는 좀처럼 재건되지 못하고 쇠락이 계속되었다. 진원일 등 근대제주불교를 담론하는 기존자료에 의하면, 이런 상황은 봉려관이 관음사 창건과 함께 본격적으로 제주지역사회에서 활동을 시작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본 논문에서는 해월당(海月堂) 봉려관(蓬廬觀)의 생애 중 비교적 논란의 소지가 있는 것을 중심으로 살펴보게 될 것이다. 먼저 승려 해월당 봉려관  생애에 있어서 주요 전환점이 되는 비양도, 산천단, 대흥사, 관음사, 법정사로 구분한 후, 각각의 장소에서 봉려관 삶의 주요 흐름이 결정되는 것을 간단히 서술해 보고자 한다.  
비양도와 관련해서는 봉려관의 출생에서부터 비양도로 건너가기까지의 삶을 살펴보고, 산천단에서는 출가하기 위해 제주도를 떠나기 전까지를 언급하게 될 것이며, 대흥사에서는 출가수계에서 관음사 창건 전까지를 검토할 것이고, 관음사와 관련해서는 관음사 창건에서부터 해월당이 입적하기까지를 간단히 살펴볼 것이며, 법정사에서는 해월당의 항일운동을 간략히 검토해 보고자 한다.
해월당 봉려관과 관련된 1차 문헌자료는 4차에 걸쳐 유실(遺失)되어 버린다. 최소 4차에 걸친 자료유실과 관음사 화재로 인한 유물소실(遺物燒失)로 인해, 부득이 현 생존자의 구술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다. 본 논문에서는 해월당과 관련된 기존의 자료와 필자가 수집한 문건 및 법선(法船, 1899-1991, 제주보현암), 정대원각(鄭大圓覺, 1900-1991)의 생존 육성녹음테이프 그리고 현존하고 계신 87분의 승(僧) 또는 재가인(在家人)의 구술채록에 근거해 정리할 것이다. 그 중 한라산 관음사에 소재한 <관음사 봉려관 비문>원문(오이화 생존 시 작성된 것으로 사료됨)과 진원일이『제주도』에 기고한 글을 중심으로, 기타 관련 자료(구술포함)를 보충해서, 봉려관 생애에 관해서 사실에 최대한 근접한 기초를 세우고자 한다. 특히 구술자료 중 안광호(1915-1989와 법인(1931-2011)의 구술은 귀중하다. 필자 개인 여건 상 미정리(未整理) 된 자료는 본 논문에 인용하지 않았다.  
본 논문은 해월당의 생애기초탐구이다. 해월당의 자세한 행적 및 주요 신앙관 및 제주사회에서의 역할과 관련해서는 향후로 미룬다. 

혜달스님의 주제발표를 경청하고 있는 참석자들

2. 비양도(飛揚島) - 관음신앙 확신

1) 출생
해월당 봉려관의 출생년월에는 이견(異見)이 있다. 
먼저 출생년도와 관련해서는, ‘1864년 설’과 ‘1865년 설’ 2가지 설이 있다. 1864년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최근 (사)봉려관선양회에서 출간한『해월당 봉려관스님』, 오영호 전 봉려관선양회장이<제주불교신문> 제889호에 기고한 글,『한국비구니수행담록』上등이다. 그러나 혜전은 ‘한국 비구니 수행전통에 대한 포럼’에서 발표한 글에서는 봉려관의 출생년도를 1865년으로 한다. 
그 외, 해월당 봉려관의 대한불교조계종 승적첩(僧籍牒), 회명의「제주관음상개금원문」(1925년), 회명의「제주도 한라산 법화사 니사 봉려관 비명 병서」(1943년), 진원일의「이야기를 남긴 사람들-안봉려관 스님」(1969년), 1927년 2월『불교』제32호「제주불교의 유래」, 김봉옥의 자필원고 <탐라불교사료>, 연종이 불교관련 언론매체에 제공한 자료 등은, 출생년도를 1865년으로 기록한다. 하나 더 첨부하자면, 안광호(1915-1989)가 1983년도에 필자에게 “이른 넷에 열반하셨다”고 하셨는데, 해월당이 1938년에 입적하셨다면, 출생한 해는 1865년이 된다. 
이상의 견해를 종합하면, 봉려관 측근의 무분별한 출생년도 인용으로 인해 1864년 설이 언급된 것으로 사료된다. 당시 호적의 신뢰도는 차치하고 봉려관의 출생과 관련된 직접 자료가 나오기 전(前)인 즉금으로서는 해월당 봉려관의 출생년도는 ‘1865년’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다음은 봉려관의 출생월일에 관해서다. 진월일의「이야기를 남긴 사람들-안봉려관스님」에서는 ‘1865년 2월 14일’로 기록하고 있다. 진원일의 의견인지 인쇄과정의 오자(誤字)인지 불분명하지만, 필자는 인쇄과정에서 생긴 오자(誤字)로 생각한다. 반면 그 밖의 많은 자료는 ‘6월 14일’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해월당의 출생월일은 ‘(음)6월 14일’로 한다.   

해월당 봉려관의 출생지는 이상의 자료 모두가 ‘제주 화북리’로 기록한다. 그러므로 해월당 봉려관의 출생지는 ‘제주도 화북리’로 한다.

해월당의 속명과 관련해서는, 세간에 안봉례, 안봉려, 안려관 등등으로 언급된다. 그러나 1983년 광주광역시 서석동 흥룡사에서 안광호(안광호의 師叔이 봉려관이다. 안광호는 필자의 노스님이시다)는 필자에게 “봉려관스님은 나와 같은 안씨다. 속가 이름에 ‘봉’자를 더해 봉려관 스님이 되셨다.”고 하셨다. 여담이지만, 당시 흥룡사 신도 중 여관 하시던 무상각보살이 있었는데, 필자는 봉려관 스님이 여관을 하시다 들어오셔서 봉려관이 된 것으로 이해했다. 절에 들어와 성이 ‘봉’씨로 바뀌고, 법명은 ‘여관’인 것으로 필자가 이해한 것이다. 법명이 3자(字)인 스님을 필자가 그때는 본 적이 없었으니까. 지금 보면 앞뒤가 안 맞게 이해한 것이지만, 필자가 무식하고 멍청하게 이해한 결과 봉려관의 이름을 잊지 않은 것 같다. 
종합하면, 해월당 봉려관은 1865년 6월 14일(음력) 제주 화북리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안(安)씨이며, 모친은 신씨(申氏)이고, 次女이다. 속명은 안려관(安廬觀)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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