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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려관 스님, 산천단에서 승려가 될 의지 확립근대한국여성의 선구자 해월당 봉려관 스님 ③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관음사가 주최하고 탐라성보문화원이 주관한 해월당 봉려관 스님의 발자취 세미나에서 전 동국대 선학과 강사 혜달 스님이 주제 발표한“근대한국여성의 선구자-해월당 봉려관 스님”을 본지에서 다시 소개하게 되었다. (단, 지면의 제약으로 각주는 부득이하게 생략해서 실었다.) <편집자주>

 

 

 

안봉려관 스님

3)1900년 후반~1901년

진원일은 이르길,

동리 청년들이 모여와서 요망스러운 계집이라 하고 불상을 때려 부수며 다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때려죽이겠다고 협박을 하는 것이었다. 그 집을 팔아버린 후 산천단에 가서 조그마한 집 한 채를 짓고 관음정진을 하며 불상을 구하려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가 비양도에 불상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것을 구하기 위하여 37세 되는 서기 1901년 봄에 비양도를 건너가려했다.

<관음사 봉려관 비문> 원문에는,

부지런히 여기저기 참방하던 중, 신축(1901년) 봄에 곧 비양도로 건너갔다.   

종합하면, 봉려관이 어떤 승려에게서 받은 목불상은 화북 청년들에 의해 파손되었고, 불상(佛像)없이 화북을 나와 산천단에 거처를 다시 마련한다. 그리고 봉려관이 비양도로 불상을 구하러 간 시기는 1901년 봄이다. 계속해서 기술하기를,

중간에서 태풍을 만나 배가 침몰하게 되었다. 일심으로 지성스럽게 관세음보살을 불렀다. 그랬더니 이상하게도 의복이나 버선이 젖지 않고 비양도 어느 집에 무의식 중 들어가 있었다. 그러므로 관세음보살의 신통력이라 해서 그 후 더욱 부지런하게 관세음보살을 불렀다. 비양도에서 불상을 구하지 못하고……

<관음사 봉려관 비문>의 원문(오이화 生前에 작성 된 것으로 사료됨)에는,

비양도로 가던 도중 바다 한 가운데에서 맹렬한 폭풍을 만나 배가 거의 전복되려 했다. 당황해 허둥지둥하던 상황에서 봉려관은 도리어 지성으로 관세음보살을 불렀고, 어언 간에 옷과 버선이 젖지 않은 채, 비양도에 도착했으며, 그리고는 바닷가 어느 집에 머물게 되었다. 관세음보살의 신력으로 이렇게 무사한 것임을 문득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상생활 하던 중에도 일찍이 이 생각을 잊은 적이 없었다. 비단 염불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을 구제하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마음속으로 하였다. 마침내 이르길“만일 나의 뜻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면 맹세코 머리를 빗지 않을 것이다.”라고 혼자 되뇌었다. 
즉 봉려관이 자연적인 악조건 속에서 관음신앙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비양도로 가다 태풍을 만나 관세음보살의 위력을 체험하게 되었고, 이후 더욱 부지런히 관음정진에 매진한다. 비양도 가던 도중의 체험은 어떤 어려움도 관음신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 부여에 일조(一助)한다. 여기에서의 체험이 향후 제주불자의 신앙관과 수행관 방향조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 셈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발현되도록 하였다. 결국 비양도에서의 체험은 봉려관에게 하화중생(下化衆生)의지를 발아(發芽)하게 한 밑거름 역할을 하였고,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비장한 의지는 비양도에서 되돌아온 후 산천단에서 발아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비양도에서 불상을 구하지 못하고 되돌아온다. 태고종 제주종무원에 소장된 <耽羅佛敎史料>에서도,

광무 5년(1901년:신축년) 37세 때 비양도(飛揚島)에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 돌풍(突風)을 만나서 배가 전복되었다. 순간 자기도 모르게 관세음보살을 연창하였는데 어느 사이에 몸은 무사히 포구에 표착되고 있었다. 이때부터 관세음보살의 신통력에 감복되어 자나 깨나 앉아서나 누어서나 관세음보살을 염불하면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출가할 것을 결심하였다.(김봉옥 친필원고, pp.105-106) 

비양도에서 되돌아오는 도중에 돌풍을 만났다고 기술 한다. 돌풍을 만난 시점이 <관음사 봉려관 비문> 또는 진원일의 서술과는 다르지만, 돌풍으로 인해 관세음보살의 신통력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맥락은 같다. 그리고 이후 더욱더 관음정진에 전념했고, 중생제도의지 발아에 도움이 되었다는 내용 역시 큰 차이가 없다.   
이상을 종합하면, 봉려관이 현목련을 출산한 후 일정기간이 지난 후에 현 씨 집을 나온 것으로 사료되고, 같은 동리(洞里)에 집을 구입한 후 이곳에서 거주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을 것으로 유추한다. 같은 동리에 새 거처를 마련한 것은 당시 현목련의 출산과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라 사료된다. 그리고 당시 사회는 상호간 관심이 지대해서 주위에서 발생하는 사소한 일에도 설왕설래가 잦던 시대이고, 봉려관의 관음정진수행 역시 마을 사람들에게는 이해 불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새 거처에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 배척 받은 것으로 사료된다. 
그리고 비양도에 간 시점은 <관음사 봉려관 비문>의 ‘辛丑春(1901년 봄)’을 따른다. 필자는 봉려관이 1901년 봄 불상을 구하러 비양도를 가기 한두 달여 前에 산천단에 새 거처를 마련했을 것으로 본다. 반년도 안 되는 시간에 봉려관의 삶에는 아주 많은 변화가 일어났고, 그녀는 이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길을 개척해가고 있었다.  
 
3. 산천단(山川壇) - 출가수계의지 확립. 下化衆生의지 발아(發芽).

산천단은 봉려관에게도, 근대제주불교에 있어서도, 제주도민에게도 매우 중요한 장소이다. 
본래 한라산 산신제단은 한라산 최정상부 정북(正北) 방향에 위치했었는데, 이약동(李約東, 1416-1493)이 제주목사로 부임(1470년 10월–1473년 8월)한 후, 산신제를 지내다가 동사(凍死)하는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산천단에서 행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산천단이 제주도민의 한라산신제단이 된 것이다. 한라산신은 제주도민 생활 속에 뿌리 깊게 자리한 매우 주요한 신앙대상 중 하나이다.  
진원일의 기술에 의하면, 봉려관이 집을 나와 같은 동리에 새 거처를 마련하고 관음정진을 하였고, 이를 못마땅하게 본 동리청년들에 의해 쫓겨나 다시 산천단으로 옮겨와 조그마한 집 한 채를 짓고 거주를 시작한다. 필자는 이때를 1900년 늦겨울에서 1901년 초일 것으로 본다. 또 필자는 이 집을 산천단 소림사의 전신으로 보고 있으며,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산천단 소림사의 최초창건연대일 개연성도 있다고 사료된다. 왜냐하면 안광호와 법인의 구술에 의하면, 봉려관이 대흥사에서 수계(受戒)를 한 후 대흥사에서 불상을 모시고 목탁 등을 준비하여 제주로 되돌아와서 거주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미 승려 봉려관이 있었고, 신앙대상인 불상이 있었으며, 불교의례를 집행할 장소가 구비되어 종교의식이 집행되었기 때문이다. 단 공식적으로 ‘사찰명’ 또는 ‘포교당’이라는 현판을 갖추었는지 그 유무는 지금으로선 모른다. 이 부분은 향후 새로운 구술채록과 심도 있는 연구가 절실하다.    
봉려관이 산천단에 거주한 기간은? 진원일은 서술하기를, 

비양도에서는 불상을 구하지 못하고 그대로 산천단에 돌아와서 6년간을 쉬지 않고 관세음보살을 불렀다.……1907년 음력 9월에 중 될 생각으로 전라남도 해남군 대흥사를 찾아갔다.

봉려관이 산천단에서 승려가 될 의지를 확립한 것이다. 
진원일에 의하면, 봉려관이 산천단에 거주한 것은 7년하고도 반년의 세월이다. 필자는 산천단 거주기간을 7년이 채 안될 것으로 본다. 산천단 거주 시작점에 있어서는 진원일과 필자의 견해는 다르다. 왜냐하면 필자는 목련의 출생(1900년 2월 9일, 陰)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봉려관이 수계(受戒)를 결심하게 된 계기, 수계를 위해 제주도를 떠난 시기, 왜 수계 장소가 대흥사인가? 제주도에서 대흥사까지의 여정에 대한 검토를 해 보자.
봉려관이 수계(受戒)를 결심하게 된 계기는? <관음사 봉려관 비문>원문에 의하면, 봉려관이 비양도를 가던 도중 태풍을 만나 배가 전복되려 하는 와중에 관음정진을 해서 의복과 버선이 젖지 않은 채 비양도 바닷가에 무사히 도착하게 된 것이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이라 믿었고, 그 후 계속해서 이때의 일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다만 비단 염불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을 구제하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마음속으로 하였다. 마침내 이르길 “만일 나의 뜻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면 맹세코 머리를 빗지 않을 것이다.”라고 혼자 되뇌었다. 1907년(丁未) 9월에 곧 출가의지를 내고는 해남 대흥사로 갔다.

위 인용문에 의거하면, 고통에 처해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어 그들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것(廣濟衆生), 이것이 바로 봉려관이 출가수계를 결심한 계기이다. 1918년 3월 2일『매일신보』「제주도 아미산 봉려암의 기적-꿈같은 기괴한 이야기」에서는, 

바다 위로 솟는 해와 물결 사이에 춤추는 석양을 볼 때마다 높고 청정한 생각이 나며, 원포귀범(遠浦歸帆)의 노 젓는 소리며, 평소 낙안의 슬픈 울음을 들을 때마다 우리 인생의 허탈함을 느끼어 만경창파의 편주 같은 외로운 영혼을 위대한 부처에게 의탁하기로 하고, 홀연히 집을 떠나 여승이 되고 마셨다. 

한 폭의 옛 산수화를 그려놓은 듯한 내용이다. 여기에서는 출가수계를 결심한 계기를 ‘높고 청정한 뜻’ 그리고 ‘인생의 허탈함’ 이라 한다.  
종합해 보면, <관음사 봉려관 비문>원문이 내용서술형식이나 전체 문맥연결 상 비교적 객관성을 띠고 있다고 본다.『매일신보』는 지면의 한계로 인해서인지 그 이유가 불분명하지만, 그간 봉려관의 많은 이야기는 생략하고 ‘높고 청정한 뜻’ ‘인생의 허탈함’으로 승려가 되기까지의 긴 이야기를 대신한 것으로 보인다. 굳이 연결시킨다면, ‘고통에 처해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어 그들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것(廣濟衆生)’이 ‘높고 청정한 뜻’에 해당한다.

제주불교신문  jejubulgy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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