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향 에세이 - 인욕(忍辱)-붇다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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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향 에세이 - 인욕(忍辱)-붇다의 가르침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01.09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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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훈(혜향문학회 회원)

불교에서, 수행하는 여섯 가지 덕목 중에 세 번째가 ‘인욕’임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말로는 인욕, 인욕 하지만 실제로 어떤 게 인욕인지 내용을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단순히 ‘참는 것’이라고 두루뭉수리하게 이해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물론 ‘참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유가(儒家)에서도 참을 인(忍)자를 상당한 덕목으로 취급한다.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정책으로 인한 성리학의 영향으로 무턱대고 참으라고 해서 참다보니, 우리나라에서만이 흔한 화병을 앓는 이가 많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맹목적인 인내를 강요하지 않는다. 자신의 체면을 지키기 위한 화가 아니라 상대방이 반성토록 교육적인 매질로서의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하게 여긴다. 보통 ‘인내’라 하면 참는다는 게 다 통하겠지만, 그걸 세분해서 ‘욕됨을 참는 것’ 즉 모욕을 당해도 참는다는 것은 상당한 수양이 없고서는 불가능하다. 쉽게 말하면 ‘내가 논리적으로 이길 수 있지만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꼬리를 내린다.’는 그런 비굴한 마음이 아니라 ‘너의 생각이 잘못 됐지만 잘못됐다고 따지면 싸움이 일어날 것이기에 참는다.’라는 비굴이 아닌 겸양을 일러 ‘인욕’이라 한다. 
얼마 전, 단체 행사에서 난처한 일을 당했다. 토론하는 시간이었는데 내가 의견을 제시하는데, 느닷없이 중간에 튀어나와 화를 내면서 집행부의 견해에 무조건 따라 주지 않는다는 식으로 손사래를 치면서 주먹질이라도 할 양으로 달려드는 사람이 있었다. 아마 집행부의 결정을 방해라도 하려는 의견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그래도 그렇지 화를 내면서 큰소리 칠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난 조그만 가책도 없었기에, ‘의견도 제시할 수 없느냐’면서 지지 않으려고 달려들려는데, 주위사람들이 ‘회원들이 보고 있다’고 참으라고 말려서, ‘앗차’하고 물러섰다. 그렇게도 불교에서 강조하는 ‘인욕(忍辱)’을 잠시 잊었던 것이다. 10여년을 같이 활동하는 간부급 회원이라 화를 내지 않고 꾸지람을 했었다면 양해할 수 있었을 텐데, 달려들면서 화를 내는 데는 마음에 여유를 갖지 못하고 덩달아 같이 화를 내려던 자신을 뒤늦게 발견했던 것이다. 나는 부처가 아니지만 너는 왜 부처 같은 마음을 내지 못하느냐는 억지였던 것이다. 내 수양이 부족함을 인지하는 순간이었다. 
아무 이유 없이, 자신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모욕을 당했던 경우를 누구든 한번쯤은 경험했음직하다. 물론 모욕을 주는 입장에서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게 오만이든 오해든 착각이든 간에, 그처럼 분하고 화가 났을 때는 눈이 뒤집혀 사리를 분간할 마음에 여유를 갖기가 어렵다. 이유를 따지다 보면 분명 다툼으로 발전한다. 결국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게 된다. 그런 게 당연한 세상사라고 일축해 버린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순간, 아주 짧은 순간을 참음으로써 서로에게 상처가 되지 않게 되면 그게 오히려 세상을 현명하게 살아가는 방법이 아닐까? 제주 속담에 ‘지는 게 이기는 것이다’란 말이 있다. 이런 경우에 쓰는 말로 보인다. 겉보기에는 지는 것 같지만 결과적으론 이기는 형태가 되는 것이다. 
흔히들 남들이 하는 일이, 또는 남들의 생각이 잘못됐다고 마치 재판관이라도 된 양 훈수를 두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나 역시도 무의식중에 그런 말을 해진다. 사람마다 생각이, 보는 눈이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데서 생기는 오류다. 즉, ‘다르다’를 염두에 두지 못해 ‘틀리다’에만 집착해 마음에 여유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내로 남불’이라고, 내가 바람을 피우는 것은 로맨스이고 남이 바람을 피우는 것은 불륜이란 생각을 한다는 말이다. 똑같은 상황을 두고도 생각의 위치에 따라 관념이 다를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언필칭 ‘팔은 안으로 굽는다’라고 육체적인 ‘팔’을 빗대어, 마음도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작용한다고 말을 한다. 어려운 용어로 ‘중용(中庸)’이라든가 ‘정의(正義)’하고는 반대되는 ‘편견(偏見)’이다. 성인군자도 아닌데 편견을 갖는 게 당연하다고 스스로를 위안한다. 
그렇다면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 ‘성인군자’는 어떤 의미일까? 나와 관련이 없으면 성인군자를 존경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자신과의 거리가 너무 까마득하게 느껴져 아예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닐까? 성인군자가 되면 무슨 이득이 있을지 계산이나 해 봤을까? 
성인군자가 됐다고 해서 하늘에서 돈다발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배고프면 밥을 먹고, 밥을 먹으려면 일해야 한다. 먹었으니 배설해야하고, 슬프면 울고 기쁘면 웃는다. 이마에 ‘나 성인군자다’라 써 붙이고 다니는 것도 아니다. 그럴 필요가 없기에 ‘성인군자’다. 다만 ‘자신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다’는, 그래서 불행하다는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일 것이다. 그러기에 존경하고 우러러보며 자신도 조금씩이나마 닮아가려고 하는데서 관계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이처럼 성인군자 타령을 길게 나열하는 이유는, 성인군자와 나와의 관계를 확실하게 설정하고 인생을 살아가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다. 요즘 상대방의 견해를 깔아뭉개는 말로 ‘너나 잘해!’하는 김 빼는 소리로 자신의 권위를 지키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누가 뭐래도 자기 방식대로 살겠다는 데는 방법이 없다. 누가 우쭐대려한다고, 가르치려 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보면 자격지심일 것도 같다. 제주의 옛 속담에 ‘아기업게 한티도 배울게 싯나.(업저지한테서도 배울 점이 있다)’라는 이 말은, 비록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도 배울 바가 있다는 격언이다. 허튼 소리로 들리면 흘려버리면 되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이기 때문이다. 
불교를 믿는다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어느 큰스님께서, 대부분의 신도들이 유치원 불교를 빨리 졸업하고 고등 불교로 진학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다고 안타까워 하셨다. 물론 교과서에 있는 구별은 아니겠지만 초급에서 중급, 고급으로 올라가는, 각자의 믿음이 다양함을 일컫는 말이다. 일평생을 유치원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즉 발전이 없는, 엄마의 치맛자락에서 벗어나기가 두려운, 남의 꽁무니나 따라다니는,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의 타입이다. 부처님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부처님’소리만 들어도 벌벌 떠는 순수한 마음의 소유자들인 것도 모른다. 그게 비굴한 의식, 행동임을 모르고, ‘겸손’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그런 것이 부처님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일까? 앞에서 말한 ‘겸양’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부처님 빽(배경)’을 믿는 것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는 것은 한참 다르다. 그걸 제대로 구별할 수 있다면 상당한 위치의 불교를 믿는 것이다. 
불교가 타 종교와 다른 점은, ‘절대자’란 ‘신(神)’을 숭상하지 않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어느 종교나 다 절대자를 내세운다. 그래서 절대자 앞에서, 사람의 존재 가치를 과소평가하게 해, 스스로에게 한계를 짓게 하고, 인간의 무기력함을 강조하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그래야 절대자의 위치가 돋보이니까 불교에서도 타종교에 질세라 부처님을 ‘절대자’로, ‘신(神)’으로 내세우는 것 같다. 국어사전에서도 그렇게 쓰여 있다. 대부분의 스님들도, 그게 아니라면서도 신도들에게는 강조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사실을 알면서도 손쉬운 방법을 택함인지는 모르나, 불교의 발전을 위해서는 과감하게 방향을 틀지 않으면 안 될 것으로 보인다. 몇 천 년을 그렇게 이어 왔으니 쉽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느슨한 교리 영향이라 하더라도 공부 부족이 원인으로 보인다. 그리고 신도들이 고급불교로의 분발도 큰 몫을 할 것이다. 
붇다의 가르침인 ‘인욕’을 떠올리며 느낀, 모자란 사람이 그저 허공에 내지르는 헛발질로 받아들여도 불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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