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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산사, 부석사(浮石寺) (2)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사찰순례(77)
무량수전 옆에 지어진 선묘낭자의 초상화를 모신 선묘각

부석사를 창건한 이는 의상대사(義湘, 625~702) 이다. 의상대사는 원효대사(元曉, 617~686)와 함께 신라를 대표하는 승려로 두 분은 비슷한 시기를 살았다. 우리나라의 오래된 사찰에는 두 분의 이름이 들어간 곳이 많다. 부석사나 낙산사처럼 실제로 그런 사찰도 있지만 그분들이 그 모든 사찰을 세우는데 영향을 끼쳤거나 거기서 머물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그만큼 두 분이 우리나라 불교사에 끼친 영향이 컸기 때문에 그분들의 이름에 기대고픈 마음 때문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사실 두 분의 이름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도 널리 알려졌었다. 고려시대에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에는 의상대사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義湘傳敎)이 전한다. 

의상법사의 아버지는 한신(韓信)이고, 성은 김씨이다. 나이 29세에 서울 황복사(皇福寺)에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영휘 초년에 당나라 사신 가운데 배를 타고 귀국하는 사람이 있어 그 배를 타고 중국으로 들어갔다. 처음 양주에 머무르다 종남산(終南山)으로 들어가 지엄(智儼)을 뵈었다. (중략) 종남문인 현수(賢首)가 『수현소(搜玄疏)』를 지어 한 벌을 의상에게 보내면서 은근한 뜻을 담은 편지도 동봉하였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묘낭자가 바다로 뛰어드는 장면


“서경 숭복사(崇福寺)의 중 법장(法藏)은 해동 신라 화엄법사의 시자(侍者)에게 글을 올립니다. 작별한 지 어느새 20여 년 세월을 지났지만 사모하는 정성이야 어찌 마음속을 떠나겠습니까? 더욱이 연기와 구름은 1만 리에 깔렸고, 바다와 육지는 1,000겹이나 쌓였습니다. 이 몸이 다시 뵙지 못하는 것을 통한으로 여기며, 회포와 그리움을 어찌 다 말에 담겠습니까? 전생에 인연을 같이 했고, 금세에는 학업을 함께 닦았으니 이 과보를 얻어 대경(大經) 속에 함께 목욕했고, 선사의 특별한 은혜를 입어 오묘한 경전의 가르침을 전수받았습니다. 우러러 들으니, 상인(上人)께서는 고향에 돌아가신 뒤로 『화엄경』을 강연하여 법계의 막힘없는 연기를 드날려, 겹겹의 제망(帝網, 제석천의 그물)으로 불국을 더욱 새롭게 하여 세상에 크고 넓은 이익을 주신다 하오니 기쁜 마음이 한량없이 더해집니다. 여래가 입적하신 이후 불교를 빛내고 법륜을 다시 굴려 부처님의 가르침을 오래 머물게 하실 분은 오직 법사뿐임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저는 앞으로 나가는 것에 이룬 것은 하나도 없고, 일을 주선해도 도움이 되는 것이 더욱 적었습니다. 우러러 이 경전을 생각하니 선사께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저 분수에 맞춰 받아 지키면서 잠시나마 손에서 놓을 수 없었으니, 이 업에 의지하여 내세에 좋은 인연 맺기를 바랄 뿐입니다. 다만 스님께서 쓰신 책은 뜻은 풍부하지만 글이 간략해서 후세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그래서 제가 스님의 은밀한 말씀과 오묘한 뜻을 기록하여 『의기(義記)』를 이루었습니다. 가까운 장래에 이것을 승전법사(勝詮法師)가 베껴 고향으로 가지고 돌아가 신라에 전할 것입니다. 그러니 상인께서는 책의 잘잘못을 자세히 검토하시고 일러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중략) 
 상인께서는 옛날의 정분을 잊지 마시고 제취(諸趣) 속에서도 정도로써 가르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인편이 있으면 때때로 안부를 전해 주시기를 기다리겠습니다. 

바다로 뛰어든 선묘낭자가 용이 되어 의상대사를 태운 배를 신라까지 안전하게 모시는 장면 (13세기 제작, 일본 교토박물관)

이 편지를 쓴 법장스님(법호는 賢首, 643~712)은 의상대사와 마찬가지로 중국 화엄종의 2대 조사인 지엄(智儼, 600~668)으로부터 화엄학을 배우고, 중국 화엄종을 대성시킨 인물이다. 이 편지는 자신이 연구하여 쓴 화엄경에 대한 글들을 신라에 있는 한 스승 밑에서 공부했던 의상대사에게 검토해달라는 내용이다. 오늘날로 치면 노벨상을 받은 외국의 최고의 권위자가 한국에 있는 학자에게 자신의 글을 평해달라고 편지를 보낸 것과 같다. 그만큼 의상대사와 원효대사는 당대 최고의 불교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놀랍게도 이 편지 원본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신라에 있던 이 편지는 고려시대에 중국으로 건너갔고, 원나라 때부터 지금까지 최소한 17명의 수장가들의 손을 거쳤다. 1816년에는 당시 청나라 황제인 건륭제의 맏아들인 성친왕의 수장품이 되었다가 이후 대만의 수집가에게 넘어갔다. 그러다 1954년 일본 천리교가 이 편지를 구입하여 현재는 일본 텐리대학(天理大學)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의상대사에 대한 또 다른 일화 중 하나는 바로 선묘낭자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다. 송나라 때 쓰인 『고승전』에는 의상대사가 당나라에 처음 도착해 등주의 한 신도의 집에 머물렀는데, 그 집의 딸 선묘(善妙)가 의상대사에게 반해 수차례 고백하였으나 의상의 굳은 마음을 바꾸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자 선묘는 “저는 스님께 귀의하여 스님의 학문이 대성하기를 기원하며 필요한 모든 것을 바치겠나이다.”라고 소원하였다. 이후 종남산에서 화엄학을 배우고 돌아가는 길에 그 신도의 집에 인사하러 들렸는데 마침 밖에 있던 선묘는 스님을 만나지 못했다. 스님이 신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선묘는 부랴부랴 그동안 준비한 옷과 집기를 넣은 상자를 들고 포구로 나왔으나 의상을 태운 배는 이미 출발하였다. 실망한 선묘는 가지고 간 상자를 바다에 던졌는데 그 상자가 저절로 의상이 탄 배를 따라갔다. 이러한 기적이 일어나자 용기를 얻은 선묘는 자신이 의상의 수호신이 될 것을 맹세하고 바다로 풍덩 뛰어들었다. 용으로 변한 선묘는 의상의 배를 등에 태우고 신라까지 인도하였다. 
이러한 이야기는 일본에도 널리 알려졌었다. 일본 승려 묘에(明惠, 1173~1232)는 『고승전』에 기록된 원효와 의상의 이야기에 기초하여 <화엄연기(華嚴緣起)>라는 글을 쓰고, 이를 화가에게 그림으로 그리게 하였다. 이것이 일본 두루마리 그림의 걸작 중 하나이자 국보로 지정된 <화엄종조사회권(華嚴宗祖師會卷)>이다. 말 그대로 화엄종의 조사인 의상과 원효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묘에 스님은 교토에 있는 유명한 절인 고산사(高山寺) 인근에 선묘니사(善妙尼寺)를 세우고 선묘상을 만들어 봉안하였다고 한다. 선묘니사는 오래전에 폐사되었고 오늘날 조각과 그림은 교토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부석사에는 무량수전 옆으로 선묘각이라는 작은 절집이 있는데 그 안에 선묘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 부석사에 가면 선묘각에 들러 잠시라도 의상대사를 연모해 신라까지 온 중국 낭자 선묘의 애절한 마음을 기려보자. 

제주불교신문  jejubulgy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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