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단옷날에 국성정각보살이 봉려관 스님에게 가사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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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단옷날에 국성정각보살이 봉려관 스님에게 가사 전달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02.20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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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한국여성의 선구자 해월당 봉려관 스님 ⑧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관음사가 주최하고 탐라성보문화원이 주관한 해월당 봉려관 스님의 발자취 세미나에서 전 동국대 선학과 강사 혜달 스님이 주제 발표한“근대한국여성의 선구자-해월당 봉려관 스님”을 본지에서 다시 소개하게 되었다. (단, 지면의 제약으로 각주는 부득이하게 생략해서 실었다.) <편집자주>

 

 

정신을 가다듬어 산천단이란 곳에 내려오니 마침 충청도 계룡산에 산다는 노승이 있어 합장배례하며 말하되, 수월 전에 부처님이 현몽하야 말하되 남희섬 가운데에 한 도승이 나타났으니 너의 유전하는 가사를 친히 전수하라 하여서 곧 행구를 차려서 남방의 모든 섬을 널리 찾았으나 종적이 망연하더니 지금 우연히 귀인을 만났으니 원컨대 이 가사를 받으소서 하고 가사를 드리며 다시 부탁하는 말이 이를 가지시고 자중자애 하시와 큰 사업을 성취하소서 하더니 홀연히 절하고 물러가 버렸더라.

「제주도 아미산 봉려암의 기적」의 일부분이다. 여기에서의 운대사는 가사 전달자로 봉려관을 정하고 온 것이 아니라, 우연히 봉려관을 만나 가사전수자임을 확신하고 가사를 전달 한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운대사’가 아니고 ‘노승’이 등장한다. 이 노승의 거주지는 충청도 계룡산이며, 전해 내려오는 가사를 친히 전수하러 온 것이고, 이 가사는 봉려관에게 전수된다. 가사 전수자(傳授者)와 관련해서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술한다. 산천단에서의 가사전수와 관련된 중요한 문헌임에도 불구하고, 김석윤을 운대사로 지목함에 있어서 도움이 되지 않아서인지 불분명하지만, 한금순은 이를 인용하여 분석하지 않는다. 
운대사가 김석윤이 아닌 것을 방증하는 문헌 역시 인용해서 비교와 검토가 이루어져야 객관적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한금순은 관련 문헌은 인용해서 쭉 써 놓기만 하고(인용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있다), 함께 비교 분석은 하지 않는다.   ……
 ‘노승’이라는 단어는 나이 혹은 법납(法臘)이 지긋한 분을 이르는 말이다. ‘운대사’의 ‘대사’라는 단어도 법납이나 법력이 높으신 분을 일컫는 말이다. 그렇다면 봉려관에게 가사를 전달한 분은 법납과 법력이 꽤 있는 승려라고 볼 수 있다. 1907년 김석윤은 세납 31세, 법납 14세인 사미승이다. 노승(老僧) 또는 대사(大師) 호칭이 걸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김석윤의 이력을 고려해도 당시 김석윤의 법력은 이에 훨씬 못 미친다. ……
그리고 봉려관은 1907년 12월 8일 대흥사에서 수계(受戒)한 후, 1908년 1월에야 귀도(歸島)해서, 운대사에게 가사를 받고, 그 후에 관음사 창건을 한다. 그러나 회명은 봉려관이 1908년 5월 단옷날에 운대사에게 가사를 받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금순은 봉려관이 언제 가사를 받았다고 보는가? 한금순과 회명 모두 관음사 창건연도부터 틀어진 것이다. 회명은 1908년 봄에 관음사를 창건했고, 1908년 5월 단옷날(양력 6월 3일) 운대사에게 가사를 받았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관음사를 창건한 후 가사전수가 이루어진 것이 된다. 가사전수와 관음사 창건의 전후맥락에 문제가 발생해 버린 것이다.    
운대사와 관련해 필자의 결론은, 운대사는 봉려관이 단 한 번 조우한 법납과 세납이 있으신 미지(未知)의 스님이다. 더는 운대사를 신격화하거나, 한 인물에 억지로 짜 맞추는 것은, 이제 멈추어야 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여러 정황 상 결코 김석윤은 운대사가 아니며, 그 가능성이 전무(全無)하다.
봉려관이 운대사로부터 받은 가사가 의미하는 바를 이향순 교수는 “이 사건은 출가승으로서의 봉려관의 위상을 섬사람들에게 분명히 확인시킴으로서 그녀로 하여금 제주사회에서 군중들의 노골적인 박해를 받지 않고 종교지도자로서 공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힘을 부여했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의 의견은 다르다. 봉려관이 산천단에서 받은 가사가 봉려관의 위상을 확인시켜 준 것에는 일부 동의하지만, 봉려관의 위상이 크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본다. 가사가 전달된 것일 뿐, 사자상승 같은 의미는 전혀 없다고 본다. 그리고 가사를 전수받은 후에도 봉려관에 대한 핍박과 폄하는 계속되었다. 이는 당시 이 가사가 봉려관 위상을 섬사람들에게 확인시켜주지 못했다는 것을 말한다. 이유는 가사전수 이후에도 다수의 민중들은 봉려관을 통해서 불교이해가 불가(不可)했었고, 불교를 통해서 봉려관을 이해하는 것도 불가(不可)했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봉려관의 처지를 고려해도 유추가 가능하다.  
또 산천단에서 가사가 전수될 당시 제3의 인물이 있었다는 언급을 기존 자료에서 볼 수 없을 뿐더러, 안광호와 법인도 가사 전수 당시 제3의 인물이 있었다는 언급은 없었다. 봉려관 자신이 가사 전수사실을 어필했다 하더라도 당시(혹은 상당기간) 그 효과는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필자는 가사전달은 신이(神異)한 사건이 아니라, 승려 봉려관에게 전달되어야만 될 인연이 도래한 것으로 본다. 이 가사전수로 인해 봉려관의 광제중생의지에 힘이 더 부여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가사전수(袈裟傳受)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가사는 가사일 뿐이다. 이 가사로 인해 봉려관 삶에 어떤 변화가 있었고, 이 변화가 지역사회와 국가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이것에 주목해야 하는데, 가사 자체에 과도한 의미부여를 하고, 또는 신비한 상황으로 몰고가다보니, 엉뚱한 사람이 운대사로 등장하는가하면, 선대(先代)의 우호적인 상호관계가 후대인의 지나친 과욕으로 인해 불협화음을 조장하는 결과까지 초래하게 된 것이다. 이런 불협화음을 조장한 자는 책임을 전가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당당히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봉려관이 가사전수(袈裟傳受) 이후에도 계속된 핍박을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은 산천단에서 결의한 ‘광제중생(廣濟衆生)’의 의지 때문이었고, 이 의지는 대흥사에서 한센병 환자를 치료함으로써 더욱 자신감을 갖게 했다. 그리고 종교지도자로서 공적인 활동이 가능한 힘을 부여한 것은, 대흥사에서 수계(受戒)한 이 시점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대흥사에서의 수계가 산천단의 가사전수로 이어지고, 그리고 관음사 창건을 위한 100일 관음기도로 연계된다. 여기에서 대흥사 수계와 산천단 가사전수는 외적 그리고 형식상 부여받은 힘이고, 한라산 백록담에서 100일 관음기도 하던 중 얻은 힘이 종교지도자로서 공적인 활동을 할 수 있게 한 내적 힘이다. 이어서 해월굴에서 계속된 관음정진기도는 봉려관의 내적 힘을 더욱 공고히 다졌다. 이런 내적, 외적인 힘이 향후 해월당 봉려관을 탄생시킨 원동력이라고 본다.  
봉려관에게 가사를 전달한 또 한 사람은 담양 만석꾼 국채웅(鞠埰雄)의 딸 국추(鞠秋)이다. 보살명은 대덕심(大德心) 또는 성정각(成正覺) 등이 있다. 국추는 봉려관을 은사로 출가한다. 법명은 성해(性海)이고, 법호는 학천(鶴天)이다. 
「제주한라산관음사법당중건상량문」은,

담양에 사는 청신녀 성정각이 두 번째로 기도하던 중에 임신년 오월 단오날에 또 가사 한 벌을 받은 것이다. 한 분은 무신년이고 한 분은 임신년이고 보니 같은 甲年 같은 오월 단오날에 같은 곳인 봉려관 비구니가 지은 산천단에 같은 부처님의 법의를 같이 받은 것이니 얼마나 기이한 인연인가. 이는 봉려관 비구니가 이렇게 신비하며 이상한 奇緣으로 스승이 되었다 하겠고 따라서 成正覺이 봉려관 비구니의 제자가 된 것은 참으로 드물게 있는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다.
    
1932년 5월 단옷날(양력 6월 8일)은 봉려관과 국성정각의 첫 만남이었다. 첫 만남에서 국추가 봉려관에게 가사공양을 올린 것이다. 두옥문도 구술에 의하면, 

산천단에 도착한 국추보살은 흙일을 하는 봉려관 스님을 보았지만, 봉려관 스님은 쳐다보지 않고 토담만 쌓고 계셨다. 점심때가 되어서 국추보살이 도인스님을 만나 뵈러 왔다고 하고 가사를 드리러 왔다고 하니까, 그때서야 눈길을 주었다. 국추는 가사를 봉려관 스님께 드렸다.……점심이라고 함지박 같은 그릇에 담긴 밥을 주셨는데, 내어주신 밥이 너무 조악(粗惡)해서 차마 먹기 엄두가 나지 않아 속이 불편해 먹지 못하겠다고 하니까, 봉려관 스님이 물을 떠오라 해서, 물을 한 대접 주어서 마시고 나니 속이 편해져서 국추보살이 그 밥을 드셨다고 한다. 

산천단은 봉려관 스님 전체 생애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 맞는 장소

봉려관과 국추보살의 첫 만남 이야기이다. 이후 국추보살은 제주 관음사 불사(佛事)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국채웅 일가의 관음사 불사참여는 국추보살의 신심에서 비롯되었고, 법선의 관음사중창불사 원만회향을 위한 신심어린 희생에서 회향된 것으로 사료된다. 담양 국채웅씨 일가는 전남 권역 사찰의 불사뿐만 아니라, 1950년대 불교정화운동에도 적지 않은 보시를 하였다.  
종합하면, 산천단은 봉려관 전체 생애에 있어서, 4번의 중요한 전환점을 맞는 장소이다. 하나는 봉려관이 출가하여 수계를 받고자 하는 의지를 확립한 장소이고, 둘은 봉려관이 하화중생의 비장한 의지를 발아한 장소이다. 셋은 무신년(1908) 봄(단오날)에 운대사(김석윤은 아니다)에게서 가사 한 벌을 전수 받은 장소이고, 넷은 임신년(1932) 단옷날에 담양 국성정각보살에게서 가사를 전달받은 장소이다. 이 밖에 산천단의 봉려관 거처는 근대제주에서 최초 종교로서 불교의식이 거행된 장소이기도 하다. 안광호와 법인의 말처럼 관음사보다 먼저 사찰역할을 한 장소로도 볼 수 있다. 즉 후일 산천당 소림사의 전신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봉려관의 입적지가 아니어도 산천단의 봉려관 거점지는 근대제주불교사에 있어서 충분하고도 넘치는 가치와 주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장소이다. 또 산천단 소림사는 일제강점기 제주도민의 정서안정에도 톡톡한 역할을 한 장소이기도 하다. 향후 이런 가치와 의미를 지닌 산천단 소림사가 제주도민의 힘으로 위조된 역사가 아닌 참된 역사를 지니고 제자리에 재건되기를 기대한다.  
 자연적 악조건은 봉려관의 출가수계결심(出家受戒決心)과 하화중생의지의 밑거름이 되었고, 종교문화관의 차이에서 발생한 사회적 시련은 도리어 봉려관의 하화중생의지(下化衆生意志)를 발아시켜 자연스레 박애(博愛)실천으로 연계된다. 비양도와 산천단은 이처럼 안려관에서 근대제주불교를 재건한 봉려관으로 시대를 운반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 장소이다. 또한 비양도와 산천단은 근대한국여성 해월당의 삶을 견인(牽引)시킨 장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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