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생명체들을 나의 귀빈으로 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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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명체들을 나의 귀빈으로 여깁니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02.20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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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 방일 법회 ④

고옥자 포교사<제주시 포교사단 19기>가 지난해 연말 달라이 라마 방일 법회를 다녀왔다. 고 포교사는 3일간 이어진 이 법회에서 들은 달라이 라마 법문을 정리, 본지에 보내왔다. 그리고 지상법문을 통해 이를 게재하게 됐다. <편집자주>

 

◈이어진 질문들, AI라든가 현재 과학이 종교를 대신할 수 있는가하는 첫 법회 질문에 대한 달라이 라마 답변  ②
……
지구상에 다양한 종교들이 생겨났다. 자이나교 이후 30년이 지나서 불교가 생겼고, 그 후 기독교, 이슬람교가 생겨났다. 
인도에서 발생한 종교 중에 창조주를 인정하는 유신론과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이 있는데, 창조주를 아버지라 칭하며, 창조주를 ‘사랑’이라 부른다. 
불교는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는다. 인도의 산케이학파와 자이나교는 ‘아트만’을 인정하지만, 불교는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무아’이다. 
나는 한 인간이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을 나의 귀빈으로 여길 뿐 아니라 천신과 아수라들도 귀빈이나 어버이처럼 생각하는 수행자다. 아침에 일어나면 모든 중생들을 나의 귀빈, 어버이로 모시겠다고 생각하며 아라행을 행하겠다고 관전하면서 장애를 없앤다. 
모든 중생들을 벗으로 생각하고 윤회에 사바세계에다 우리가 가지는 모든 안락함과 구속함은 중생들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는 것은 궁극적인 해탈을 하는 것도 중생들의 덕택이다. 나의 스승 링린포체 스님은 돌아가신 뒤 의학적인 사망진단을 내렸지만 14일동안 시신이 부패하지 않았다. 왜, 시신이 부패하지 않았는가를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한 과학자의 의견으로는 뇌활동이 정지된 후에도 외파는 움직이고 사망 후에도 의식은 있다고 정리했다. 
인도는 다양한 종교를 가지고 있지만 분쟁은 없다. 물론 사상과 학설로 인한 논란은 있으나 그것은 어떤 분야에도 다 그럴 수 있다. 그래서 종교의 화합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티베트 또한 정치적 역할은 모두 다 내려놓았다. 나란다의 전통을 이어가는 것은 티베트밖에 없다. 인명학, 불교논리학, 중관학, 유식학 등이 뛰어나다. “비구들이여, 나의 설법도 검증해서 받아들이라”는 부처님 말씀은 논리적이면 받아들이라는 나란다의 전통이다. 
37보리분법은 소승과 대승의 공통적이라고 논의한 적이 있는데, 무상, 고, 무아 사례를 인명학, 논리학을 통해서 검증하고 받아들인다. 성주괴공이라는 것이 사대요소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과학자들도 설명하며, 빅뱅이라고 표현한다. 
양자물리학, 인지학을 가지고 과학자들과 40년동안 교류했는데, 대단히 도움이 되었다. 불교가 논리적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교류가 지속될 수 있었고,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나란다 전통의 티베트불교가 유일하다고 생각한다. 
불교인구는 10억 중에 4백만 명 정도가 불자이다. 티베트불교는 토론하고 부처님의 경전을 공부하고 문사수를 행하고 큰 깨달음을 얻는다. 
부처님의 법과 가르침을 기울임없이 잘 지켜오고 있는 곳이 티베트이다. 지구의 보물이며, 인류의 보물이다. 
지금까지 불교에 관심이 없던 곳들이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불자가 증가하고 있다. 일본은 대승불교국가이고 반야심경을 봉독하는 국가로 법문하는데 망설임이 없다. 
불교의 심리학이나 인명학은 티베트어가 중요하다. 스님들에게는 교학(경전공부)을 중요시 시킨다. 설일체유부의 맥이 없기 때문에 ‘비구니 교단’이 없다. ‘계시마’를 2년 전부터 배출했다. 중생들의 정신적인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술이나 약을 먹는 것은 근본적인 치료가 되지 않는다.
탐진치를 없애야 되는데 이것을 습관화시켜야 점점 더 강해질 수 있다. 이는 대승 전통의 보리심을 일으킨다. ‘보리’라고 하는 것은 수행으로 인해서 모든 허물을 알 수 있는 지혜를 얻는 것이다. 탐진치가 번뇌장, 업수습, 소지장의 허물이 모두 없어졌을 때 ‘보리’이고 부처의 경지이다. 
외경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내면의 인식이라 하더라도 또한 모든 현상들이 실체를 얻을 수 없다. 단지 다 있는 것처럼 착각할 뿐이다. 연기사상, 공성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현재 미래라고 하는 마음, 잘못된 분별로 인해서도 번뇌가 일어난다. 
대승은 공사상과 보리심이다. 나 또한 보리심 수행을 하고 있다. 보리심 수행을 통해서 이기심을 줄이고 이타심을 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주변의 사람들을 벗으로 생각할 수 있다. 공성을 이해하게 되면 번뇌를 이기고 더 많은 자비심을 낼 수 있다. 우리는 무지 때문에 고통 받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공사상이 중요하고 보리심이 중요하다. 
‘나’라는 견해를 소멸하여 실행하기 매우 어렵고, 지속적으로 긴 시간동안 갈고 닦아야 하는 복덕과 지혜의 선근공덕을 겸허하게 일으킨다. 이 수행을 통해 복덕과 지혜의 자량을 온전히 완성할 것이다. 선근공덕이 온전히 완성되면, 일체종지를 손에 넣은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일체종지의 뿌리는 오직 자비심이니, 처음부터 이 수행을 익혀야 한다. 
보리심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세속과 승의이다. 세속은 자비로써 모든 중생을 실제적으로 구제하기를 서원을 한 뒤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부처가 되겠다’라는 발원으로 무상정등각을 원하는 첫 번째 마음(원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승의의 보리심은 세간에서 벗어나 모든 희론을 제거한다. 가장 명확하며, 승의의 경계 대상이며, 흠이 없으며, 흔들림이 없고 바람에 꺼지지 않는 등불처럼 동요가 없는 것이다. 
보리심을 성취하는 것은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을 오랫동안 공경하는 마음으로 수행을 한 다음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마타만 수행하는 것은 수행자의 업장을 끊지 못할뿐더러 일시적으로 번뇌를 억누르는 것일 뿐이다. 지혜의 빛이 생기지 않으면 잠재되어 있는 번뇌를 완전히 소멸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므로 잠재되어 있는 번뇌를 온전히 소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해심밀경』에서 “선정으로 번뇌들을 억누른다. 지혜로써 잠재되어 있는 번뇌를 소멸하게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사마타가 없는 위빠사나만으로 수행을 한다면 수행자의 마음은 경계에 흔들릴 뿐만 아니라 바람 속에 있는 등불처럼 흔들린다. 그렇게 되면 지혜의 빛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두 가지 모두에 균등하게 의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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