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흥사 - 항일운동의지 발아(發芽) 근대제주불교 첫 비구니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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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사 - 항일운동의지 발아(發芽) 근대제주불교 첫 비구니 탄생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02.27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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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한국여성의 선구자 해월당 봉려관 스님 ⑨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관음사가 주최하고 탐라성보문화원이 주관한 해월당 봉려관 스님의 발자취 세미나에서 전 동국대 선학과 강사 혜달 스님이 주제 발표한“근대한국여성의 선구자-해월당 봉려관 스님”을 본지에서 다시 소개하게 되었다. (단, 지면의 제약으로 각주는 부득이하게 생략해서 실었다.) <편집자주>

 

해월당의 삶에서 대흥사는 근대제주불교 비구니 봉려관을 탄생시킨 곳이다. 그리고 봉려관의 자비 손길로 인해 한 비구의 삶이 새롭게 시작된 곳이며, 또 민족적 자존심을 되찾으려 했던 뭇 사람들의 피를 봉려관이 직접 목격한 장소이기도 하다. 봉려관은 이곳에서 항일을 결심한다. 

1)해남 대흥사에서 출가 수계한 봉려관 스님
봉려관이 수계하고자 대흥사에 도착한 정확한 월일(月日)은 즉금은 불분명하다. 우선 봉려관이 대흥사에 도착한 시기부터 수계까지를 살펴보자. <관음사 봉려관 비문>원문에는, 

정미(1907) 9월 출가할 의지를 내고 해남(海南) 대흥사(大興寺)로 갔다. 그 해 겨울 성도절(음 12월 8일)에 청봉(晴峯)화상을 의지해 치발수계(薙髮受戒)하였다. 

보덕사 법인이 필자에게 언급하시길, 

계를 받기 위해 봉려관 스님이 대흥사에 도착하였으나, 행색은 남루하고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으며 몰골이 거지같아서 주지스님이 처음 보고는 더는 만나주지 않고 멀리했다. 봉려관 스님은 사중 스님의 도움으로 며칠간 기거하면서 산중을 돌아보게 되었는데, 그러다가 살이 곪아 썩어 가는 스님을 보게 되었다. 그 스님이 않던 병은 당시 난치병으로 알고 있던 문둥병이다. 봉려관 스님이 고쳐보겠다고 했으나 주위에 누구도 믿지 않았지만, 전날 사중 스님 꿈에 환자를 고칠 사람이 온다는 꿈 이야기가 생각이 나서,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환자를 봉려관 스님에게 맡겼다. 봉려관 스님이 묵은 된장과 몸을 감쌀 천을 달라고 해서, 썩어가는 상처부위마다 된장을 바른 후 전신을 광목천으로 둘둘 말고는 환자에게 지금부터 관세음보살만 지성으로 염불하라 했다. 며칠이 지나고(정확히 소요된 기간은 말씀하지 않으심) 봉려관 스님이 광목천을 벗겨내자 온 몸에 구더기가 바글바글했고, 봉려관 스님이 감았던 천으로 된장을 쓸어내고는 환자를 씻겨 주었다. 그 후 썩어가던 상처 부위에 딱쟁이가 앉기 시작했고, 그 스님은 완쾌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대흥사스님들이 봉려관 스님을 보는 눈이 달라졌고, 온 산중이 떠들썩했으며, 거들떠도 보지 않던 봉려관 스님에게 대중공사를 해서 계(戒)를 주기로 했는데, 당시 대흥사 청신암에 사시던 상노스님 유장스님을 은사로 (니한테는 고조할아버지 격이다) 정해주고는 스님을 만들어 주었다. 삭발은 유장노스님이 하셨고, 봉려관법명은 대흥사 조실스님이 주셨다. 

대흥사 주지를 역임하셨던 박영희가 백화암 비구니 경현에게 말씀하시길,

해가 설플 때 봉려관 스님이 대흥사에 오셨고, 내가(박영희스님) 직접 보았다. 치료 후 문둥병 걸린 스님 몸에서 벌레가 나온 것도 보았다. 그러자 문둥병 걸린 스님을 멍석에다 아궁이의 재를 놓고는 둥글렸는데 벌레가 재 때문에 죽는 것을 보았다. 

위의 이야기는 많이 회자되는 것으로, 다수의 사람이 여러 버전으로 언급하지만 이야기의 맥은 거의 일치한다. ‘된장’과 ‘소금’과 ‘아궁이 재’ 이 3가지 재료배합 상의 차이는 있지만, 당시 상황전개는 거의 같은 맥락이다. 그 광경을 직접 목격한 박영희의 간략한 서술은 처음 치료과정은 생략되고 마지막 과정만 언급되지만, 그래도 가장 믿을 만하다. S스님은, 

전 대흥사 주지⎕⎕스님에게 전해 듣기를, “그날 큰스님 꿈에 하늘의 소리를 듣는 보살이 온다고 하면서, 그 사람이 오면 문둥병 걸린 비구를 보여주라고 해서 기다렸는데, 어두컴컴해지자 머리는 산발해서 단정하지 않고 뚱뚱하고 작은 여자가 들어왔다. 어디서 왔는지를 물으니까 제주도에서 왔다고 했다. 봉려관 스님이 이 도량에 나병환자가 있냐고 물었고, 조실스님은 꿈이 생각났지만, 하도 행색이 이상해서 머뭇거리다 문둥병 걸린 스님이 있다고 했다. 봉려관 스님이 된장을 가져다 달라고 해서 한 다라니를 가져다주었고, 이 된장을 바르고 환자가 낳았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봉려관 스님은 계를 받았고, 봉려관 스님에게 청신암에 있으라고 해서 청신암에 계셨다.”고 들었다. 이 이야기는 당시 청신암 노스님도 똑 같이 하셨다.

위에서 말하는 청신암 노스님은, S스님이 위의 이야기를 전 대흥사 주지⎕⎕스님에게서 전해들을 당시, 그때(1980년대) 청신암에 주석하셨던 노스님을 말한다. 2018년 입적하셨다. 
필자가 채록한 구술을 정리하면, 대흥사에 도착해 한센병 환자를 치료한 이야기에는 2가지 버전이 있다. 하나는 대흥사 버전인데, 대흥사 대중 중 한 스님이 한센병 환자를 고칠 사람이 내일 온다는 꿈을 꾸었고, 안려관이 마침 대흥사에 와서 반신반의하고 환자를 보여주었다는 것. 둘은 제주도 버전으로, 대흥사 조실이 전날 여왕이 온다는 꿈을 꾸었고, 저녁 해질 무렵 안려관이 대흥사에 도착했으나 행색이 너무 남루해 그녀를 무시해 버렸는데, 안려관이 산내암자를 돌아보다 한센병환자를 발견하고 치료했다는 것. 필자는 대흥사버전에 표를 주고 싶다. 왜냐하면 법인이 혜원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더 신빙성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봉려관이 대흥사에서 수계(受戒)한 후, 은사인 유장이 주석하셨던 대흥사 청신암(淸神庵)에 일정기간 거주했다는 것이다. 제주로 귀도(歸島)하기 전까지 승려생활에 필요한 기본 작법 등을 배우고 익혔던 것으로 사료된다. 1918년 3월 2일『매일신보』「제주도 아미산 봉려암의 기적」에서도 “자취를 산간에 부치고 경문을 배우며 염불을 외다가 다시 고향으로 발을 돌이키어……”고 한다. 봉려관이 대흥사에서 수계한 후 은사가 머물던 청신암에서 경문을 배우고 염불을 습득한 후 다시 제주도로 되돌아오기까지 일련의 과정이 유추되는 문헌이다. 하지만 수학한 경문에 관해서는 봉려관의「승적첩」을 제외하면 언급이 없다. 법인은 “봉려관은 스스로 독학해서 경문을 안 것이지 누가 가르쳐준 것은 아니다. 늘상 관음기도에 열중하셨다.”고 하셨다. 진원일이 “글은 ㄱ자도 배운 일이 없다하지만 한글은 물론 어려운 한문까지 잘 알고 있었다”고 한 것처럼, 경문은 독학으로 알게 된 듯하다. 
봉려관 승적첩에 의하면, 봉려관의 은사는 유장(有藏)스님이며, 성명은 장유장(張有藏)이고, 법호는 유장(有藏)이며, 대흥사 청신암에 주석하셨다. 봉려관의 사미계사는 봉성(奉誠)화상이며, 성명은 박청봉(朴晴峯)이고, 법호는 청봉(晴峯)이다. 안려관의 법명은 봉려관(蓬廬觀)이며, 1907년 12월 8일에 해남 대흥사에서 득도식을 거행했고, 사미니계를 수지(受持)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수계 후 제주도에 도착한 시기는? 이견(異見)이 있다. <관음사 봉려관 비문>원문에는,

제주로 되돌아온 것은 다음해(1908) 정월 5일이다. 

진원일, 장연종도 1908년 1월 5일에 제주로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나 백환양씨(白桓陽氏)「한라산 순례기(속)」에서는,

 일즉 한 비구니(속명 안명 봉녀관者)가 있어 거금(踞今) 25년 전(前韓 강희원년 정미 12월 28일)에 해남 대흥사에서 체발(剃髮)하고 월명년(越明年) 무신(戊申) 5월 初5일에 본도에 들어와서…….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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