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세존의 가르침의 핵심은 연기의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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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세존의 가르침의 핵심은 연기의 도”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03.06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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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 방일 법회 ⑥

고옥자 포교사<제주시 포교사단 19기>가 지난해 연말 달라이 라마 방일 법회를 다녀왔다. 고 포교사는 3일간 이어진 이 법회에서 들은 달라이 라마 법문을 정리, 본지에 보내왔다. 그리고 지상법문을 통해 이를 게재하게 됐다. <편집자주>

 

 

쫑카파대사는 문수보살을 친견하신 후 후학 가르침을 접고 문가수행을 시작하셨다. 문수보살이 붓다빨리띠를 머리 위에 얹어주는 꿈을 보신 후 붓다빨리라를 보게 되고 깨달음을 얻으신 후 오도송으로 남기신 것이 연기찬탄문이다. 

나무 구루 만쥬코카야(스승 문수보살께 귀의하나이다)

기를 알고 설하시는 위없는 지혜를 갖추신 최고의 설시자設施者 승자이시여, 연기를 알고 설하시는 그분께 예경합니다. 
세간의 쇠퇴한 모든 것 그 뿌리는 무명이니 연기를 아는 지혜로써 무명을 멸하므로 이를 설하셨네. 
그러므로 지혜를 갖춘 이는 연기의 도가 당신 가르침의 핵심임을 어떻게 이해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므로 보호자이신 당신께 누군가가 찬탄하는 문門 중에 연기를 설한다는 것보다 더 훌륭한 찬탄이 어디 있겠는가. 
연(조건)에 의지하는 어떤 것이든 그것은 자성으로 공空하다고 설한 것보다 더 신비롭고 훌륭하게 설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범부들이 연기를 잘못 파악하므로 상견과 단견으로 공고히 묶이고 지혜로운 자들이 연기를 잘 파악하므로 희론의 그물을 자르나니.
이 가르침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기에 그러한 설시자는 오직 당신 뿐. 여우에게 사자라고 부르는 것처럼 외도들에게는 아첨의 말이네. 
오, 스승이시여! 오 수호자이시여! 오, 최고의 설시자이시여! 오 보호자이시여! 연기를 바르게 설하신 세존께 나는 귀의하옵니다.
유익을 주시는 당신께서 중생을 돕기 위해 설하신 가르침의 핵심인 공성을 알게 하는 더할 바 없는 논리인 연기의 방식에 대하여 상위인 (相違因)이 되거나 불성인(不成因)이 된다고 (모순되거나 터무니없는 논리라고) 보는 자들이 당신의 이 방식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당신께서 언젠가 공성을 연기의 뜻으로 본다면 자성으로써 공함과 행위로 타당함이 모순되지 않다고 하시어 (자성이 없는 것과 인과 사이에 모순이 없네) 
그 반대로 인식한다면 공함에 행위는 타당하지 않고 행위를 가짐에 공함이 타당하지 않음으로 공하다고 인과를 부정하고 인과라고 공을 부정하면 곤궁함의 나락으로 떨어진다고 하셨네. 
그러므로 당신의 가르침에서 연기를 보는 것이 훌륭하다고 찬탄하는 것이니, 연기 또한 완전히 없는 것도, 자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에도 아니네. 
의존하지 않는 것은 허공의 꽃과 같으니, 그러므로 의존하지 않는 것은 없다네. 자성으로 존재한다면 그것이 생기는 것과 인과 연에 의지하는 것은 모순된다네. 
그러므로 의지하여 생기는 것 외에 다른 어떤 법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성으로 공한 것 그 외에 다른 어떤 법은 없다고 설하셨네.
자성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제법에 자성이 존재한다고 하면, 열반에 든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고 모든 희론이 소멸되지 못함을 설하였다네. 
그러므로 “자성이 없다”고 사자후로 거듭 반복하여 많은 학자들 가운데 훌륭하게 말씀하신 것, 이것에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자성이 없는 것과 이것에 의존하여 저것이 생기는 타당한 원칙, 이 두 가지가 모순되지 않고 합일되는 것은 말할 필요가 있을까.
의존해서 생기는 이유로 극단의 견해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훌륭하게 설한 것이 보호자인 당신이 위없는 설시자가 되는 이유라네.
이 모든 것이 자성으로 공하다는 것과 이것으로부터 그 과보가 생긴다는 확실함 이 두 가지는 서로 모순되지 않고 벗이 되는 것이니,
이것보다 더 신기한 것과 이것보다 더 훌륭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런 방식으로 당신을 칭송한다면 찬탄할 것이고 다른 방식으로써는 아니네. 
미혹의 노예가 되어 당신(세존)을 증오하는 이는 자성이 없다는 소리를 견디지 못하게 됨에 놀랄 것이 무엇이겠는가. 
당신의 보배로운 가르침의 보고인 연기를 인정하면서, 공성의 사자후를 견디지 못한다면 이것에 나는 놀라게 된다네. 
무자성으로 이끄는 위없는 문인 연기의 명칭 그 자체로서 자성이 존재한다고 인식하면 이런 중생들은 앞으로 최고의 승자들이 잘 다가가는 비할 바 없는 입문인 당신을 기쁘게 하는 훌륭한 도에 어떤 방법으로 이끌겠는가. 
개조하지 않고 의존하지 않는 자성과 개조하고 의존하는 연기 이 두 가지를 어떻게 한 토대에 모순되지 않고 모을 수 있겠는가. 
(자성은 실제이며 의지함이 없고, 연기는 실재없이 의지하는데 이 둘이 어찌한 대상에 모순없이 양립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의존해서 생기는 것은 자성으로 본래부터 공하더라도 그것은 현현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은 환과 같다고 설하셨네. 
당신의 가르침에 어떠한 반론자라도 법답게 이기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을 이것만으로 잘 이해하나니. 
왜냐하면 이것을 설함으로써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사물에 대한 상견과 단견의 위험에서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라네.
당신의 설함이 위없는 것이라고 보는 이유인 연기의 이 도에 의해 다른 가르침들도 바른 것이라는 확신이 생긴다네. 
뜻을 여실히 알고서 설하신 당신을 따르고 배운다면 모든 쇠퇴함에서 멀어지리라. 모든 악행의 뿌리를 멸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가르침에서 반대 방향으로 오랫동안 고행하더라도 오히려 허물들을 뒤에서 부르는 것과 같이 아집을 공고히 하기 때문이라네. (반대방향으로 오랜 고행의 수행을 하더라도 아집을 공고히 하기 때문에 허물이 오히려 늘어나네)
오호라, 지혜로운 이가 이 둘의 차이를 이해한다면 그때 뼛속 깊이에서 당신을 어찌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신의 많은 가르침은 말할 필요도 없고 다만 한 부분의 뜻만이라도 피상적으로 생기면 그것으로 최고의 기쁨을 준다네.
오호! 내 마음은 무명으로 부서져 이러한 공덕의 쌓임에 오래 전부터 귀의하였지만 티끌만큼의 공덕도 얻지 못했네. 
그러나 죽음을 향한 목숨의 흐름이 끊어지기 전까지 당신을 조금이라도 믿는 것 이것 또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네. 
설시자 중에 연기를 설하는 자, 지혜 중에 연기를 깨닫는 지혜 이 둘은 세간에서 최고의 왕과 같다고 훌륭한 당신만이 알 뿐 다른 이는 아니라네. 
당신이 설하신 모든 가르침은 연기로부터 시작해 들어가고 또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이며 적정의 원인이 되지 않는 행이 당신에게 없네. 
오호라! 당신의 가르침은 어떤 이가 귀로 듣는다면 이들 모두 적정이 되기 때문에 당신의 가르침을 배움에 누가 공경하지 않겠는가. 
모든 반론자를 격파하고 위아래 모순되는 것이 없고 중생에게 이리를 주는 것 이 방식에 나는 환희심이 늘어나네.
이것을 위하여 당신 어떤 때는 몸, 다른 때에는 목숨 사랑하는 친척과 물질들을 무수한 겁 동안 거듭 보시하였네. 
연기의 특징을 보고서 낚시로 물고기를 낚는 것처럼 당신의 마음을 이끄는 이 법을 당신께 직접 듣지 못하는 것은 복이 부족한 것이리라. 
그런 고통의 힘으로 사랑하는 아들을 향해 어머니의 마음이 뒤따른 것과 같이 내 마음은 떠나지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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