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려관 스님, 1909년 관음사 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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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려관 스님, 1909년 관음사 창건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03.13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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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한국여성의 선구자 해월당 봉려관 스님 ⑪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관음사가 주최하고 탐라성보문화원이 주관한 해월당 봉려관 스님의 발자취 세미나에서 전 동국대 선학과 강사 혜달 스님이 주제 발표한“근대한국여성의 선구자-해월당 봉려관 스님”을 본지에서 다시 소개하게 되었다. (단, 지면의 제약으로 각주는 부득이하게 생략해서 실었다.) <편집자주>

 

5. 관음사 - 근대제주불교 발원지, 관음성지.

조선시대의 민간신앙 및 불교 탄압으로 인해 축소되고 퇴락되었던 제주불교와 제주민간신앙이, 봉려관시대에는 서로 수용하여 제주불교는 기복 신앙적 요소가 더욱 뚜렷해지고, 불공형식의 의례가 주를 이루게 되었으며, 기층민중의 종교관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해월당은 시종일관 관음신앙을 전파했다. 관음사를 위시해서 산천단, 백록담, 영실 등 해월당의 관음신앙 발길이 한라산 곳곳을 거쳐 갔으며, 특히 한라산 관음사는 제주에 관음신앙을 전파한 한국의 5대 관음성지의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 관음사 창건
한라산 아미봉 아래에 관음사 창건지(創建地)를 결정하고, 現 해월굴에서 창건을 위한 기도용맹정진과 창건 준비를 병행하던 봉려관은, 관음사를 창건한다. 먼저 관음사 창건연도와 창건자(創建者)에 대해서 살펴보자. 
관음사 창건년도는 <관음사 봉려관 비문>원문에도 언급된다. 이르길,

해를 넘겨 다음 해 기유(己酉) 봄에 한라산에 사찰(건물)을 창건했다(越 明年, 己酉 春, 創建寺宇於漢拏山).

‘한라산에 사찰을 창건했다’는 것은, 관음사를 가리킨 것이다. 기유(己酉)는 1909년이다. 즉 관음사 최초 창건을 마친 해가 1909년 봄이라는 것이다. 이 때 관음사의 사찰건물 양식은, 주위의 나무를 베어 기둥을 삼고, 제주 돌 사이사이에 흙과 어욱을 버무린 것을 넣어서 벽을 만들고, 어욱(제주 방언)으로 지붕을 얹은 인법당 한 채뿐이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필요에 의해 3채가 되었고, 후에는 어욱 지붕을 얹은 집이 여러 채 세워진 듯하다. 회명의「제주 한라산 관음사 법당 중건 상량문」에서도 “이 절이 처음에는 풀로 엮은 암자더니, 다음에는 뒤쳐서 기와집이 되었다.”고 한다. 1909년 봄 관음사는 창건되었고, 現 관음사 주지 허운이 유추한 것처럼, 봉려관이 대흥사에 관음사창건을 알리고자 갔다가 대흥사 항일운동참상(1909년 7월 9일)을 보게 되었다면(안광호와 법인의 구술을 참조하면 1909년 대흥사 심적암 참상을 봉려관은 보았다), 그렇다면 관음사 창건은 1909년 상반기에 완성된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기존자료는 관음사 창건년도를 ‘1909년 봄’으로 기록한다. 
반면, 관음사 창건년도를 1908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晦明文集 ‧ 濟州島 漢拏山 法華寺 尼師 蓬廬觀 碑銘 幷書』는, “무신년(1908) 봄에 처음으로 관음사를 한라산 북쪽에 창건하니, 비로소 불법이 횃불처럼 섬 전체를 휘황하게 비추었다.”(p.178)고 한다. 그러나 <관음사 봉려관 비문>원문에는 봉려관이 4월에 토착인들의 핍박으로 거처를 겨우 피해 나와서 백록담으로 갔고, 7일 이상 지난 후에 산천단으로 내려와 운대사로부터 가사를 전달받는다. 가사 전달받은 후 바로 관음사 창건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필자가 以下에서 거론하겠지만, 봉려관이 수계 후 제주에 들어온 시기(1908년 1월 5일)를 감안하고, 당시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을 언급한 회명의 기존자료와 비교 참조해도, 회명의 ‘1908년 봄’은 관음사 창건이 불가능하다. 관음사 창건을 위해 해월굴에 정착해서 기도정진한 시기도 필자는 1908년 늦여름 또는 그 이후로 본다. 왜냐하면 운대사에게 가사 받은 시기를 회명은 1908년 5월 단옷날이라 하고 있고, 가사 전수(傳受) 후 작심하고 백록담에서 100일 기도를 하던 중 한 소식한 후, 지금의 해월굴로 내려와 관음사를 창건한 것을 유념해야하기 때문이다. 회명이 봉려관이 해월굴에 정착해서 관음사창건을 준비하던 그 시점을 관음사 창건으로 보았다해도 1908년 봄은 불가능하다. 지금 공개된 회명의 자료에 의존해서는 회명의 확실한 견해를 알기 어렵다. 이런 유(類)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반드시 번역되기 전의『회명문집』원본이 공개되어야 한다.   
종합하면, 이미 공개된 회명의 제주불교관련기록(번역본)을 경시할 수 없지만,『회명문집』외 관음사 창건과 관련된 필자가 인용한 여타(餘他)자료들에 의거하면, 관음사 창건년도를 즉금은 ‘1909년 봄’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관음사 창건자가 봉려관이라는 것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관음사 창건자와 관련된 기록은, 

•「유관음사기(遊觀音寺記)」에는, “한라산 동북 넓은 산림에 아미산이 있고, 아미산 밑에 관음사가 있다. 이 관음사는 여승 봉려관이 창건한 것이다. 정사년(1917) 여름, 일찍 일어나 행장을 꾸려 길 떠날 채비를 하니,……관음사에 이르자 초가 수십 간이…… (봉려관이 대답하기를) 5, 6년간에 수백 인의 시주를 얻어 기유년 봄에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매일신보』는, “제주도 아미산 관음사라는 절은 봉려관이라는 여승이 자기 한 사람의 힘으로 창조한 절인 바……”고 한다.
• 진원일은 “봉려관 스님은 이와 같이 해서 서기 1909년 봄 처음으로 아라리에 관음사를 창건하게 되었는데,……”고 한다.
•『불교』제 6호에서는 “최근 수년전부터 봉려관이라는 尼姑와 萬下禪師와 道月 上人이 弘誓를 발하야 삼양오름 동남 일리허에 관음사를 창건하고……”고 한다. 
•「제주도 대정 하원리 법화사 중창 상량문」은 “수십 년 전에 비구니 안씨 봉려관과 두타승 안도월 두 스님이 한라산 중턱에 관음사를 창건함으로써……”
•『불교』제71호 “한 비구니(속명 안명 봉려관者)가 있어……觀은 그 후로 여기에 관음사를 創建하고 化衆에 勤勞하였다고.”한다.
•「제주한라산관음사법당중건상량문」에 “비구니 봉려관 安씨는 이 절을 開山한 원조가 되었으니, 이를 일러 어두운 거리에 밝은 촛불을 비추는 격이라고 하겠으며……”고 한다.
•「한라산관음사조사전창립취지서」에는 “비구니 봉려관 스님은 이 제주도에 불교가 그림자조차 없을 때 태어나서 불법을 다시 일으킨 분이요, 道月定照律師는 봉려관 비구니와 姓이 같고 마음이 맞았으니, 이 분들은 모두 호법보살들로서 관음사를 성심을 다하여 창건하였으니, 이 제주도에 부처님 법의 흐름을 열어준 中始祖라 하겠다.”고 한다.
•「제주도 한라산 법화사 니사 봉려관 비명 병서」는 “무신년 봄에 처음으로 관음사를 한라산 북쪽에 창건하니, 비로서 불법이 횃불처럼 섬 전체를 휘황하게 비추었다.”고 한다.

종합하면, 한라산 관음사를 창건한 스님은 ‘봉려관’이다. 관음사 창건연도는 ‘1909년 봄’이다. 
그러나 시간이 뒤로 갈수록 관음사 창건자에 봉려관과 도월(1879-1936)을 함께 거론하기도 한다. 회명은 관음사 창건자로 봉려관을 독자로 거론하기도 하고, 봉려관과 도월(道月)을 함께 거론하기도 한다. 그러나 도월이 제주에 들어온 시기는 관음사 창건이 이루어진 1909년 봄 이후의 일이다. 회명의 의견은 관음사 증축을 염두에 둔 견해로 사료된다. 
관음사 창건과 관련해서 제3인물을 주장하는 분이 있다. 한금순은 2016년에 “1908년 안봉려관과 김석윤은 관음사를 창건하였고 1911년에는 법정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2013년 발간된 자신의 저서『한국근대제주불교사』의「김석윤과 관음사 창건」에서 김석윤이 관음사 창건에 깊숙이 관여했다고 주장하는데 “안봉려관의 관음사 창건에는 승려 김석윤의 도움이 컸다.『망형석성도인행록(亡兄石惺道人行錄)』에 김석윤이 안봉려관을 도왔음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한금순이 인용한 자료는,  
 
김석윤의 동생 김석익의『망형석성도인행록』:
“대구에서 돌아온 후 여승 봉려관과 함께 색수수(미털)에 불사를 창건하였다. 남주의 사찰들은 이곳이 그 시초가 된다. 또 法井에 도량을 열었다. 모두 施舍가 있었다(自大邱歸還後, 從僧尼蓬蘆觀, 創佛舍於塞水藪(미털), 南州寺刹此其濫觴也. 又設道場於法井, 皆有施舍).” 

역자(譯者)에 따라 같은 문장일지라도 보는 시각이 달라질 수 있다. 필자의 번역은, 

대구에서 돌아온 후, 승녀 비구니 봉려관이 색수수(내가 있고 초목이 우거진 곳)에 사찰을 창건하였는데, 제주의 사찰들은 이곳이 기원이 된다. 또 법정에 도량을 설립했는데, 모두 희사(시주, 보시)가 있었다(自大邱歸還後, 從僧尼蓬蘆觀, 創佛舍於塞水藪(미털), 南州寺刹, 此其濫觴也. 又設道場於法井, 皆有施舍).
 

색수수(塞水藪)의 塞은, 변경(邊境), 요새 ‘새’이다. 또 塞은 ‘’(塞   邊界)의 훈독자 표기이다. 水는 ‘믈>물’의 훈독자 표기이다. ‘塞水’ 즉 ‘믈’은 냇가의 물이라는 뜻이다. 藪는 풀이 무성한 호수, 소택지, 늪; 사람이나 물건이 많이 모인 곳; 어류, 鳥獸 등이 많이 모이며 초목이 빽빽이 우거진 습지를 가리킨다. ‘塞水藪’는 냇가를 끼고 있는 늪지대, 냇가 늪지대, 냇물을 끼고 있는 초목이 빽빽이 우거진 곳, 내가 흐르는 초목이 빽빽이 우거진 소택지를 가리킨다. 즉 색수수는 물이 있고 수목이 우거진 장소를 가리킨다. 여기에서 색수수(塞水藪)는 초목이 우거지고 샘이 있는 곳을 가리킨 것 같다.
위 인용문이 의미하는 바는, 봉려관이 관음사 창건하는 불사에 김석윤의 희사가 있었고, 또 봉려관이 법정사를 설립하는 불사에도 김석윤의 희사가 있었다는 의미이다. 즉 관음사 창건과 법정사 설립에 필요한 제반(諸般) 불사(佛事) 중 희사한 것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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