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칼럼 - 3.1운동 100주년, 3월은 그대로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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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칼럼 - 3.1운동 100주년, 3월은 그대로 지나간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03.13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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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준<본지 논설위원>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此)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야 인류평등의 대의를 극명하며, 차로써 자손만대에 고하야 민족자존의 정권(正權)을 영유(永有)케 하노라.”
1919년 3월1일 오후 서울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들이 낭독한 독립선언서의 첫 부분이다. 독립과 자주, 인류평등과 민족자존을 세계만방에 알렸다. 같은 시각에 서울 시내 학생들과 시민들은 탑골공원에 모여 미리 배포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밀물처럼 거리로 나섰다. 일본 제국주의 무단통치의 총칼에 태극기로 맞선 이들의 ‘대한독립만세’ 외침이 3월1일부터 5월까지 전국 방방곡곡을 진동했다.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민족이 한마음이 된 3.1 독립운동은 포용과 공존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다. 4월 말까지 전국에서 열린 1524회의 시위에 연인원 202만명이 참가했고 1000여명의 백성이 희생됐다고 한다. 3·1 독립선언서엔 분명 ‘비폭력’을 내세웠지만 군중의 위세에 놀란 일제(日帝)는 대한독립의 싹을 총칼로 이를 진압했다. 
“오호라! 금일 우리 대한에 무엇이 있는가? 국가가 있건마는 국권이 없는 나라이며, 인민이 있건마는 자유가 없는 백성이며, 어떻게 하면 내가 2000만 동포의 피와 눈물이 항상 나라를 위하여 뜨겁게 방울 맺히게 할까?
1908년 4월 대한협회보에 ‘대한의 희망’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단재 신채호 선생의 격조 높은 글로, 문장 일부분을 따왔다. 일제강점기 사학자이자 언론인으로서 민족의식을 고취했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그는 일제에 머리를 숙이지 않겠다며 고개를 뻣뻣이 든 채 세수를 했다는 일화는 선생의 올곧은 성품과 애국심을 엿볼 수 있다.   
3.1 운동이후 우리민족의 독립운동 역량은 불길처럼 산야를 번져 들어갔다. 그 다음달 중국 상해에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3.1 정신이 있었기에 임시정부는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의 토대가 된 민주공화국을 지향하게 됐다.
독립운동 100주년 3월이 흘러가고 있다. 3월은 한마디로 우리 민족의 정기를 떨치고 발양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일제의 억압에서 풀려나 조국의 주권을 되찾는 광복을 위한 우리 민족의 의지를 세계만방에 떨친 달이다. 3·1운동은 남녀, 세대, 지역, 종교, 이념을 초월해 한민족이 하나 된 울림이었다. 
우리의 독립은 거저 얻은 게 아니었다. 3.1운동을 거쳐 더욱 험난한 가십밭길의 연속적인 투쟁 결과였다. 의병활동, 임시정부의 활약, 독립군과 광복군의 투쟁, 반일을 위한 문화운동, 외교활동 등으로 결코 쉼 없이 나선 이 나라 선조들의 피나는 활동결과였다. 다른 한편에선 일본에 빌붙어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고 호의호식 하려는 이완용 같은 친일파들은 우리의 3.1 정신을 폄훼하고 동족을 희생시키는 일제의 야합에 동침하기도 했다.
“1919년 3월은 2000만 한민족이 정의와 인도의 기치를 높이 들고, 충(忠)과 신(信)을 갑옷으로 삼고, 붉은 피로 포화를 대신하여, 세상이 열린 이후 유례가 없는 맨손혁명으로 세계의 활동 무대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 달”이라고 어느 역사학자는 평가했다.
하지만 오늘날 그 많은 행사 속에 올해 100주년 맞이 3.1절은 어디로 갔나. 3월1일 날 정부 주관 아래 실시된 기념식 행사가 전부다.
필자도 딱히 할 일 없어 조천 만세동산을 참배하고 대문에 태극기를 1주일간 게양한 것으로 맘을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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