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기획 기획취재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산사, 법주사(法住寺) (1)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사찰순례(81)
법주사 전경

 

 충청북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유명한 고찰이 적다. 아마도 그 이유는 지리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바다를 접하지 않은 내륙에 위치해 다른 지역과 교류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가 오늘날 충청북도의 일부 지역을 분할하여 점령하였던 국경지대였기 때문에 큰 사찰이 들어서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다른 지역에 비해 전혀 부족함이 없다고 여겨지는 것은 바로 속리산이라는 명산에 법주사가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어렸을 때 수학여행단을 이끌고 다녀온 선친의 사진 중에 엄청나게 큰 불상을 배경으로 한 사진을 보고 불상이 얼마나 큰지 항상 궁금했었다. 어린 마음에는 특이하게 머리 위에 면류관 같은 모자를 쓴 법주사 불상이 불국사 석탑이나 석굴암의 불상보다도 더 보고 싶고 그 아래에서 아버지처럼 사진을 찍고 싶었다. 누나와 형도 수학여행으로 법주사를 다녀와서 정이품송이 그려진 수건과 나무로 만든 안마기를 선물로 사오곤 해서 어린 시절 법주사는 어린이대공원이나 창경원, 남산보다도 가장 먼저 가고픈 곳이었다. 시간이 흘러 법주사를 처음 찾은 것은 불교미술을 공부하기 시작한 1990년대 들어서였다. 안타깝게도 그때는 어릴 때 사진에서 봤던 그 불상은 안전을 문제로 해체되었고 청동으로 만든 불상이 그것을 대신하고 있었다. 회색빛 시멘트 보다 매끈한 청동에다 지금은 금박까지 해서 훨씬 화려하게 장엄된 불상이지만 과거 흑백사진에서 보았던 그 당당함을 느끼지 못했다. 어쩌면 어린 시절 추억이라는 감상에 빠져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 앞에서 아버지와 같은 사진을 찍겠다는 어릴 적 결심을 아직도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창건에 대해서 『속리산대법주사본말사기(俗離山大法住寺本末寺記)』에 의하면, 553년(진흥왕 14) 서역에서 법을 배우고 돌아온 의신(義信) 대사가 흰 노새에 불경을 싣고 와서 법주사에서 주석하였기 때문에 법보인 ‘불경이 머무르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절의 이름을 법주사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려시대에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 4권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에는 통일신라시대 큰스님인 진표(眞表) 율사가 김제의 금산사에서 나와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속리산에 들렀다가 길상초가 난 곳을 표시해 둔 후 금강산으로 들어가 발연수사(鉢淵藪寺)를 창건하고 거기서 7년 동안 머물렀다고 한다. 그 후 진표 율사가 금강산에서 돌아와 금산사와 부안 부사의방에서 머물 때 속리산에 살던 영심(永深), 융종(融宗), 불타(佛陀) 등이 진표 율사에게 불법을 배웠는데, 진표 율사가 그들에게 “속리산에 가면 내가 길상초가 난 곳에 표시해 둔 곳이 있으니 그 곳에 절을 세우고 세상을 구제하라”고 했다 한다. 그 후 영심 스님 일행은 속리산으로 가서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짓고 길상사라고 칭했다. 이후 세월이 흘러 절의 이름은 속리사로, 그리고 속리사라 불리던 이름이 다시 법주사로 바뀌었다. 오늘날에는 『삼국유사』의 내용을 따라 법주사는 영심 스님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비록 정확한 연대를 알 수는 없지만 사내에 전하는 돌로 만든 불교 유물들 중 여러 점이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이어서 그와 같은 추정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법주사 미륵대불


 현재 법주사에는 지정 문화재로 국보 3점, 보물 12점, 지방유형문화재 22점, 문화재 자료 2점이 있으며 법주사 자체는 사적으로, 법주사 일원은 명승지로 지정되었다. 실로 보물 창고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법주사에 가면 멀리서도 보이는 거대한 미륵불상에 자연히 눈이 간다. 높이 33m, 무게 160톤의 거대한 금동불입상은 오늘날 법주사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되었지만 개인적으로 그 앞에서 사진을 찍지 않는 이유는 크기를 주변 경치와 어울리게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물론 부처님의 위용을 널리 알리려면 더 커야한다는 분들도 계시지만 우리나라 전통 미술의 큰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주변과의 조화이고, 불교에서 말하는 원융의 의미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내겐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다.
 신라시대 말기 대문장가였던 최치원은 망해가는 신라에서 당나라에서 배웠던 자신의 경륜을 펴지 못하자 정계에서 은퇴한 후 명산을 돌며 도를 닦았다고 한다. 그가 속리산을 보고 속리산이란 단어를 이용하여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도는 사람을 멀리 하지 않는데 사람이 도를 멀리 하고 (道不遠人人遠道), 
산은 세상을 멀리 하지 않는데 세상이 산을 멀리 하는구나 (山非離俗俗離山).

 살면서 자신과 약속한 것조차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자신을 탓하지 않고 주변이나 다른 이유를 대어 약속을 지키지 못한 자신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사람이 지켜야 하는 도리는 물론 공부하며 배운 법문 역시 우리 일상생활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생활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산에 가면 따스하고 편안한 집이 그립고, 집에서는 탁 트인 산이 그립지만 산이 집이고, 집을 산이라 생각하면 모든 곳이 즐거운 곳이 되지 않을까? 법주사에 가면 법주사를 감싸고 있는 속리산을 보며 산과 산이 겹겹이 펼쳐놓은 아름다운 경치를 통해 우리 자신이 살고 있는 속세의 아름다움도 함께 생각해보자.

제주불교신문  jejubulgyo@hanmail.net

<저작권자 © 제주불교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제주불교신문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