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당 봉려관 스님 입적일은 1938년 5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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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당 봉려관 스님 입적일은 1938년 5월 29일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03.27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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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한국여성의 선구자 해월당 봉려관 스님 ⑬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관음사가 주최하고 탐라성보문화원이 주관한 해월당 봉려관 스님의 발자취 세미나에서 전 동국대 선학과 강사 혜달 스님이 주제 발표한“근대한국여성의 선구자-해월당 봉려관 스님”을 본지에서 다시 소개하게 되었다. (단, 지면의 제약으로 각주는 부득이하게 생략해서 실었다.) <편집자주>

 


제주 대원정사 일조스님은,

역사는 사실대로 놔두어야지, 어딘가 바꿔놓으려면 왜곡이 된다.
 
이미 지나간 역사를 되짚는 후학이 명심해야 할 귀중한 말씀이다.  
이어서는 관음사 사명(寺名) 유래 관련이다. 제주 아미산 관음사 사명 유래와 관련된 기록은 거의 없다할 수 있다.『불교』제 71호에, 

澗水가 희귀한 한라산에 甘泉이 용출함은 사원창립의 起因이다. 관음사는 앞날 朝天浦에 있었으나 폐사가 오래이라. 그 名義만을 이동하여 온 것이다.

아미봉 관음사의 사명(寺名)은 폐사된 조천포 관음사 사명을 그대로 사용했다는 내력, 그리고 지금의 관음사 터에 사찰을 창건한 원인이 ‘물맛이 좋은 샘(甘泉)’이 용출해서 라고 한다. 그래서 관음사 터가 색수수(塞水藪)라 불렸던 것 같다. 고금을 막론하고 물이 있는 곳에 인가(人家)가 있기 마련이다. 그만큼 물과 생명체는 동존(同存)관계이다. 봉려관과 샘물관련 이야기는 서귀포 원만사에서도 등장한다.  
<봉려관 승적부>에 의거하면, 1908년 4월 15일 ‘대흥사 제주도 담당 포교사’로 취임하고, 그리고 관음사 창건화주 소임에 임한다.『해월당 봉려관스님』에서는 “처음에는 대흥사 포교소로 허가를 받았다가 다음에 명칭을 관음사로 고친다.”고 한다. 하지만 근거 제시가 없다. 이어서 “관음사란 명칭은 봉려관 스님이 절을 짓게 된 것은 관세음보살의 신통력이라 하여 관세음을 생각해서 관음사라고 한 것이라 사료된다.”(p.102)고 한다.        
필자의 사견(私見)은, 봉려관이 1909년 봄에 아미봉에 사찰을 창건하고 1909년 7월 대흥사에 갔을 때, 이때 사명(寺名)이 정해졌을 것으로 유추한다. 그러나 1930년 5월『불교』제 71호의「한라산 순례기(속)」의 기술도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 순례기문은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한 기록물이기 때문이다. 1930년은 봉려관이 생존했었다. 또 관음신앙에 확신을 갖고 있던 봉려관이 조천포 관음사명을 듣고 바로 채용한 것으로도 유추가 가능하다. 봉려관과 관음신앙은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관음사 사명 유래와 관련해서는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기 전에는 어떤 유추도 무의미하다고 본다. 
 
2) 봉려관과 중앙포교당
이 부분은 향후 연구 발표할 예정이다.

3) 항일운동과 입적
먼저 해월당의 입적연월일을 살펴본다. 해월당의 입적연월일도 이견(異見)이 있다. 

•1938년 5월 29일:『회명문집』,『근대제주불교중흥조-해월당봉려관스님』 등.
•1937년 5월 26일: 진원일「이야기를 남긴 사람들-안봉려관스님」, 「안봉려관 승적부」등.

두옥문도 의견은, 윗대 스님들이 5월 28일 제사를 지낸 것에 이의(異意)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도 5월 29일이라고 알고 있고, 윗대부터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기일이어서 문제소지가 없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그리고 회명이 “무인년 5월 29일은 도월선사의 대상이었는데, 봉려관비구니가 이어서 입적하니 이는 아마 법화사의 일을 마쳐 숙세의 원을 이룬 뒤 입적한 것이 아니겠는가?”고 한다. 무인년(戊寅年)은 1938년에 해당한다. 1937년 10월 1일『불교시보』제27호「고산리 표교당의 봉불식」은,

제주도 한림면 고산리 대흥사포교당 월성사에서는 去 陰 7월 25일 오전에 봉불식을 거행하였는데, 법사 鄭金烏 화주 蓬廬觀 監 高仁京 持殿 尹奉天 諸氏의 수백 명의 신자가 집합하야 미증유의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또 법인은, 

내가 7살 때 통도사 축서암에서 봉려관 스님을 보았다. 그때 봉려관 스님은 대흥사에서 말을 타고 오셨는데, 스님이 말을 탄 것을 처음 봤기 때문에 신기해서 그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봉려관 스님은 타고 왔던 말을 타고 다시 대흥사로 가셨다. 

법인이 7살 되던 해는 1937년이다. 또 봉려관은 제주도에서도 자주 말을 타고 이동하셨고, 이와 관련된 이야기도 전해온다. 결론은 1937년도에는 봉려관이 생존해 있었다는 것이다.
진원일(1916-1987)이 “1937년, 5월 26일”이라 한 것은, 봉려관 승적부의 입적관련기록을 인용하신 듯하다. 봉려관 승적부 인증연도는 1968년이고, 진원일의「이야기를 남긴 사람들-안봉려관스님」은 1969년에 탈고한 것이다. 진원일이 봉려관과 함께 포교당 등에서 생활했던 적이 있고, 봉려관이 입적했을 때도 생존했던 분이다. 그러나 진원일의 이력을 참조하면, 1937년 3월 15일 일본국 대판시 입중본상업전수학교 수료 후 계속 일본에서 수학하여 1944년 9월 30일 일본국 경도 전문학교 문학과를 졸업한다. 봉려관이 입적한 시기에 제주도에 없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종합하면, 두옥문도 특히 안광호를 비롯해서 제주도 법선도 이의(異意)가 없었다면 입적일은 5월 29일이 맞다. 입적연도는 회명이 도월의 대상을 언급하면서까지 말씀하신 1938년 무인년이 신빙성이 있다. 또 1937년 음력 7월 25일 거행된 고산리 월성사 봉불식 참석자 명단에 “화주 봉려관”이 참석자 명단에 실려 있고,「법선스님 일대기」에도 1938년 5월 29일 입적하였다 한다. 그리고 1937년 봄 봉려관은 법선과 함께 관음사 중창불사 모연을 위해 담양 국채웅 집을 방문하였고, 1937년 봉려관을 축서암에서 보았다는 법인의 증언 등을 고려하면, 해월당의 입적연도는 1938년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해월당 봉려관의 입적연월일은 1938년 5월 29일이다. 

해월당의 입적원인과 입적지(入寂地)에 관한 당시 문헌자료는 지금 전무하다. 반면, 제주 관음사를 비롯해 중앙포교당소식 그리고 봉려관의 교계활동과 관련된 소식들은 당시 일간지를 비롯해 기타 자료를 통해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당시 제주불교에서 해월당이 갖는 인지도만 고려해도 해월당 입적을 일간지 등에서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즉금 제주에 계시는 원로 스님을 위시해서 봉려관의 직계 후손들 역시 해월당의 입적에 관해서는 기억이 뚜렷하지 않다. 지금까지 필자가 채록한 구술을 정리하면, 

• 잘 모른다. 윗대 스님들에게 들은 기억이 없다. 
• 독버섯을 드시고 입적하셨다. 뒷방에 앉아서 이야기할 때 독버섯을 드시고 돌아가셨다는 말들이 많이 있었다. 

제주 연화사 종륜(89세)이 중요한 사실을 말씀하셨다. 구술하시길, 

촉이를 잘못 드시고 관음사에서 돌아가셨는데, 관음사에서 화장을 해서 항아리를 땅에 묻고, 묻은 항아리에 봉려관 스님 유골을 항아리 안에 넣고 봉안했다가, 4‧3사건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흥 스님께서 항아리를 열고 화장한 유골을 뿌렸어요. 관음사 땅에 뿌렸다고 들었어요. 인흥 스님이 직접 열어서 뿌렸고 비구들도 옆에 있었다고 들었어요. 묻힌 항아리를 팔(파낼 때)때 독버섯을 먹고 돌아가신 것을 인흥 스님도 그 때 아셨다고 했어요.
봉려관 노스님 유골항아리를 열어서 산골 할 때, 나는 거기에 없었고, 은사스님이 직접 하셨다고 들었어요. 후에 인흥 스님이 나에게 말씀해 주셨어요. 인흥 스님이 봉려관 스님의 유골을 관음사 앞에 산골하고 나니, 이제야 가슴이 후련하다고 하셨고, 마음이 편안하다고 하셨어요.

촉이는 제주 방언이며, 버섯을 말한다. 봉려관 입적 당시 관음사 공양주였던 분의 구술을 전해들은 김보살(96세)은,

관음사 큰 비구니스님이 공양주에게 오후에 산행하자고 해서, 같이 관음사 산길을 걷다가 스님이 버섯을 발견하시고는 버섯을 따서 저녁에 끓여 먹자하시고는 공양주에게 버섯을 따게 했다. 공양주는 그 버섯을 따서 봉려관 스님과 함께 관음사로 되돌아왔다. 공양주가 따온 버섯을 끓여서 먼저 한 그릇을 봉려관 스님에게 드렸는데, 2수저를 먹자 바로 돌아가셨다. 주위 사람들에게 알려서 상을 치루고, 공양주는 혼비백산해서 도주를 해서 김보살이 사는 동네로 왔다. 이 공양주는 계속 마음이 편치 못했고, 인적이 드문 곳만 찾았는데, 사람들이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기를 원했다. 

위의 증언은 김보살이 제주에 거주하는 비구니에게 직접 한 말이다. 진원일은 입적시간을 “오후 5시”라고 한다. 해월당의 입적시간을 문자로 언급한 것은 진원일이 유일무이하다. 공양주가 오후에 산행을 함께 갔다가 버섯을 따와 저녁에 끓여서 먼저 드렸다는 증언과 입적시간이 거의 일치한다. 오후 5시는 夏期일 경우 사찰에서는 대중저녁공양시간 혹은 저녁공양시간 전(前)이다. 필자가 안광호에게 직접 들은 것은,

봉려관 스님은 독버섯국을 드시고 돌아가셨는데, 독살 당한 것이다. 봉려관 스님은 항일 운동하는 사람들을 뒤로 몰래 도왔다. 불사를 핑계로 불사금을 신도들한테 걷어서, 불사에는 돈을 조금 쓰고, 남은 돈은 항일 운동하는 사람들에게 몰래 가져다주었다. 대흥사에도 군자금 가져다주러 여러 번 갔다. 군자금 대 준 것 때문에 독살 당했다. 장례도 쉬쉬해서 치렀고, 관음사에서 화장해서 산골했다. 
    
필자가 안광호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이상에서 제기한 구술들은 왜 일간지를 비롯해 언론매체가 봉려관 입적에 대해 입을 닫았는지? 그 의문을 풀어 줄 증언 들이다. 제주도 K2스님도 “봉려관 스님이 독버섯을 드시고 돌아가셨다는 소리를 스님들 모일 때 독버섯 드시고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들을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봉려관의 항일운동방식이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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