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에세이 - 물이 오르고 꽃은 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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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에세이 - 물이 오르고 꽃은 피는데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03.27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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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현

  깊고 무거운 겨울을 털고 나무들이 기지개를 켠다. 추운 겨울이 오기 전 동해凍害를 염려해서 수액을 비우는 나무들의 지혜가 놀랍다. 
  입춘과 우수가 지나고 날이 풀리는 기운이 감지될 무렵, 겨우내 비워두었던 줄기마다 물을 끌어올리기 시작한다.
  물이 오르니 나뭇가지에 달린 잎눈이며 꽃눈이 하루가 다르게 부풀어 오른다. 감귤나무는 아직 미동微動도 않는데 그 옆 복숭아나무에는 초저녁 별 같은 핑크빛 꽃봉오리 돋아나고 있다.
  매섭고 찬바람에 아랑곳없이 철을 만나 내 집 울타리 안에는 매화와 동백꽃 이 피고, 연달아 목련과 벚꽃이 피어 뜰 안에 봄빛이 넘쳐 난다. 
  그럴 양이면 노인의 마음에도 물이 오르고 싹이 트고 시詩가 뛰놀며 젊음이 다시 오는 것 같다.
  춘분을 즈음하여 농촌지역에서는 흙을 일구고 씨 뿌릴 준비를 한다. 그런데 음력 2월 바람에 김칫독 깨진다 하듯 바람이 강해 흔히 꽃샘추위가 찾아오니 적잖이 얄궂다. 제주의 바람의 신, ‘영등할망’이 찾아와서 그럴 게다.
  이즈음 내 아란야 농장에도 주말이면 일손이 달린다. 은빛 솜털이 보송보송한 목련의 아린을 벗겨 연두 빛 하얀 꽃봉오리 속살 그대로 목련차를 만든다. 콧물 나는 감기 증세가 있을 때 이 차를 마시면 소염 효과가 여간 아니다.
  키위나무는 줄기와 가지에 물이 오르기 전 가지치기를 해줘야 한다. 죽은 가지를 잘라서 나무 곳곳에 햇볕이 골고루 들게 해야 하고, 따로 퇴비를 주지 않는데도 1년에 2∼3미터씩 자라는 가지를 솎아야 하는 때문이다.
  모든 일이 다 그렇지만, 봄 순을 움틔우기 전에 전정剪定과 정지整枝를 잘해야 풍성한 결실을 기약할 수 있다. 
  하지만 고희古稀를 갓 지난 이 몸뚱이 아무리 가지치기 잘해도 쪼글쪼글해진 피부가 반반해질 리 없고 고목에 꽃피기를 바라는 것은 과욕이 아닐까.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관절은 굳어지고 근력은 약해져 애당초부터 회춘回春은 없는 법이거늘.
  잘 꾸며진 왕의 수레가 낡아 가듯 이 몸 또한 질병의 둥지이고 부서지기 십상으로 쉬이 늙어간다. 늙고 병든 몸에는 눈 먼 새도 안 앉는다는 속담이 있다. 
  요즘 농촌에 가면 60세를 젊은이라고 부른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듯이 농사일에 아직은 쓸모가 있다는 말일 게다. 따스한 봄볕 속에 두꺼비 같은 손으로 전정가위를 잡고 나무를 손질할 때 늙은 몸도 피가 용솟음침을 느낀다. 그래서 고되고 힘들지만 농사일은 즐거운가 보다. 
  나무는 철따라 온도의 변화에 따라 옷을 입고 벗지만, 노구老軀는 체액의 흐름이나 체온의 떨어짐을 스스로 조절하지 못한다. 생로병사의 원인과 조건이 물과 온도의 작용임을 아는 지혜가 열린 건 늘그막에 농사일을 하면서부터다.
  이 몸뚱이를 구성하는 물질과 정신이 찰나적으로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지 못하는 백년의 삶보다 그 무상함을 보는 하루의 삶을 살아야겠다. 
  젊음을 돌아보지 않고 불로초도 바라지 않는다. 지난 일을 한탄하지 않고, 아직 오지 않은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다만 영혼이 주름지게 해서는 안 되겠지.  
  90세에 <근위 기병과 나부>를 완성한 피카소, 82세에 세기의 명작 <파우스트>를 집필한 독일의 문호 괴테가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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