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산사, 법주사(法住寺) (2)
상태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산사, 법주사(法住寺) (2)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04.03 13: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사찰순례(82)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사명당 유정스님이 중건한 법주사 팔상전(국보 제55호)

법주사 주차장에서 내려 참나무, 전나무, 소나무들로 우거진 편평한 숲길을 걷다보면 저절로 기분이 상쾌해진다. 맑은 숲의 기운이 탁한 차 안 공기와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 깊이 들어선 것 같지 않은데도 주변의 높은 산세가 깊은 산속에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한다. ‘호서제일가람’이라고 적힌 일주문을 지나 금강문을 향해 가다보면 세조길이라는 자연관찰로가 만들어졌다. 조선시대 초 세조 임금이 속리산에 왔다갔다는 기록과 정이품송 전설이 전하고 있어서 세조 임금이 다녀간 것은 맞겠지만 오늘날 만든 그 길이 옛날 세조 임금이 지나갔던 길과 같은 길인지는 알 수 없다. 순례를 하는 나그네로서는 잠시나마 야자 매트가 깔려 푹신한 그 길을 걸으며 임금과 같은 기분을 느껴보는 것도 좋으리라. 
금강문이 가까워지면 멀리서 담장과 건물 뒤로 33m 높이의 황금색 미륵불상이 확연히 보인다. 그 미륵불상을 이정표로 삼고 경내로 가까이 가면 탁 트인 넓은 공간에 여러 채의 건물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금강문에서 일직선으로 늘어선 사천왕문, 팔상전, 대웅보전으로 이르는 선이 사찰 전체의 기준 축이다. 여느 사찰들에서는 잘 볼 수 없는 5층 누각 형태의 팔상전과 2층 누각 형태의 대웅보전의 웅장함이 눈에 들지만 기준이 되는 그 절집들이 주변의 건물이나 오래된 유물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으면 미적 감각이 뛰어난 분일 것이다. 오래된 사찰에서는 절집들이 아기자기하게 서로 조화를 이루는데 반해 법주사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느낌은 무엇인가 허전하고 황량한 기분이다. 이러한 느낌은 법주사가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받은 여러 차례의 상처 때문이며 현재의 모습은 그 상처가 옹이처럼 남아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처음 창건된 이후야 어땠는지 잘 알 수 없으니 차치한다 해도 고려시대인 1101년(숙종 6)에는 숙종이 아우인 대각국사 의천을 위하여 인왕경회를 법주사에서 열었는데 당시 3만 명의 승려들이 모였다고 한다. 3만 명의 승려가 모였다면 승려  외에 일반인들의 숫자를 더하면 엄청난 인원이었을 것인데 그들 모두를 수용하려면 당시 법주사의 규모는 지금보다도 더 컸을 것이다. 조선시대 전기에는 세조 임금의 스승으로 존경받았던 신미(信眉)대사가 절에 머물며 중창불사를 크게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로 미루어 보면 숭유억불 시대에서도 대찰로서 위상은 계속 유지됐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법주사와 산내 암자들은 법주사가 충청도 지방의 승병 본거지였다는 이유로 왜군에 의해 깡그리 불태워졌다. 이후 황폐화된 사찰을 사명당 유정(惟政)스님이 팔상전을 중건하였고 또 다른 승병장이었던 벽암(碧巖)선사가 절 중창에 힘써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때 만들어진 건물 중 하나가 국보 제55호로 지정된 팔상전이다. 1층 한 변의 길이는 11m, 총 높이는 22.7m의 목탑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너비가 줄어들어 안정된 모습을 보여준다. 2, 3, 4층에는 창을 내어서 빛이 들어오게 하여 밖에서 보면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둥과 들보로 연결된 하나의 공간으로 이루어진 탑이다. 삼국시대 불교가 전래된 이래 한반도에서 황룡사 9층 목탑 등 많은 목탑이 만들어졌지만 그 동안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소실되었고, 현재 남아 있는 목탑으로는 조선시대 중기에 만들어진 이 팔상전이 유일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팔상전은 과거 우리나라 목탑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1968년 해체 수리 때 탑 중심인 심초석이 마련된 사리공에서 대리석 합에 든 조그만 은제 사리합이 발견되었다. 사리공의 네 벽과 위쪽을 덮은 동판에 팔상전의 건립 경위를 밝히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고 대리석 합을 싼 비단보자기에도 한글이 섞인 축원문이 적혀 있었다. 동판에는 ‘만력24년(1597) 정유년 9월에 왜군들에 의해 불타버린 것을 ... (중략) ... 승병장 유정비구가 1605년(선조 38)에 기둥을 세웠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현재 팔상전 사리장엄구는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팔상전 내부는 위로 3층까지 트고 가운데 네 기둥 사이를 막아 벽을 만들었다. 각 벽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대기 중 중요한 사건 여덟 가지를 그림으로 표현한 팔상도를 두 폭씩 배치했다. 팔상도의 첫 장면인 도솔천에서 하얀 코끼리를 타고 마야부인의 태에 드는 〈도솔래의상〉과 두 번째 장면인 〈비람강생상〉을 동쪽에 배치하고, 다음 그림들을 남쪽, 서쪽, 북쪽의 순서로 배치하였다. 즉 북쪽의 왼쪽에 팔상도의 마지막 장면인 석가모니 부처님이 쿠시나가라에서 열반에 드는 〈쌍림열반상〉을 배치한 것이다. 이 팔상도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차례대로 보는 것은 팔상전을 도는 탑돌이 하는 것과 같은 셈이 된다. 비가 오거나 추운 날이라면 팔상전 안에서 합장하고 조용히 돌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시인 나희덕은 시 <속리산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 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에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 
  
 시인은 속리산을 오르면서 ‘산다는 것은 더 높이 오르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며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온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이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찰을 순례하는 목적도 이 시인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법주사를 돌아보며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투신 뜻을 생각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가져보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