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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설법만이 인간과 역사의 세계를 구제해”광덕 스님

 

선남자여, 또한 설법에 주시기를 청한다는 것은 진법계 허공계 시방삼세 일체불찰 극미진마다 각각 불가설 불가설 불찰 극미진수의 광대한 부처님 세계가 있으니 이 낱낱 세계에 염념 중에 불가설 불가설 불찰 극미진수의 부처님이 계셔서 등정각을 이루시고 일체 보살들로 둘리워 계시거든 네가 그 모든 부처님께 몸과 말과 뜻으로 가지가지 방편을 지어 설법해 주시기를 은근히 권청하는 것이니라. 
이와 같이 하여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해도 나의 항상 일체 부처님께 바른 법 설해 주시기를 권청하는 것은 다함이 없어 생각생각 상속하여 끊임이 없되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일에 지치거나 싫어하는 생각이 없느니라. 
      『보현행원품』 중 「청법분」

청법은 법을 설해 주기를 청하는 것이다.
원래 법은 이루어져 있는 것이며 법은 원래 설해지고 있는 것이건만 범부들은 번뇌망상으로 인해 법의 실상을 보지 못하여 실상의 설법을 듣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불보살과 성현들이 나시어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깨닫도록 방편을 베푸신다. 이와 같이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깨닫도록 베풀어 주시는 방편이 설법이다. 
그러므로 설법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동작 전체 가운데 설법이 있는 것이다. 선지식을 섬기는 사람이 선지식의 말씀과 행동과 생활 전체에서 법문을 듣는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설법은 중생의 번뇌를 깨뜨리고 중생의 마음에 광명과 지혜를 열어 준다. 설법은 중생의 자기 결박을 풀어 주어 자유와 해탈을 안겨준다. 설법은 중생의 어리석음을 깨뜨려 그에게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시켜 준다. 설법은 중생의 차별과 한계와 조건을 타파해 무한한 자재를 안겨 준다. 설법은 어둠을 세척해 그의 생명에 끝없는 희망과 환희를 성취시킨다. 유한의 범부생활을 무한한 영원으로 바꾸는 것이다. 흙덩어리와 같이 혹은 돌덩이와 같이 알던 인간을 금강석이나 내지 부처님으로 바꾸어 놓는다.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온갖 장애를 없애 인간의 마음에 엉켜 있는 탐진치 삼독을 녹여 버려 광명이 찬란한 자성 공덕을 드러내 준다. 
설법이 이러한 위력이 있으므로 설법이 있는 곳에 중생의 생명수가 있다고 하고 미망의 밤을 밝혀 주는 태양이 있다고 한다. 설법에서 불국토가 열리고 불자가 성숙해 간다. 참으로 설법은 중생에게 있어 생명의 의지처요. 그의 생명을 비추어 키워 주는 영원한 태양이다. 
이러한 설법은 그 형식이 한정될 수 없고 그 내용이 또한 무한일 수밖에 없다. 중생 개개인의 생각을 바로잡아 주기도 하고 생활 방식을 가르쳐 주기도 하며 그에게 새로운 힘과 능력을 열어 주기도 하고 새로운 자신과 용기를 안겨 주기도 한다. 비단 개인만이 아니다. 중생과의 관계, 사회와의 관계, 나아가 가정과 여러 가지 단체 사회 내지 국가 생활에 이르기까지 그가 있어야 할 위치와 움직여 나아가야 할 목표와 운영해 가는 원리를 설파한다. 그런 까닭에 설법은 개인의 수양, 개인적 인격 규범, 여러 계층의 도덕 윤리 경제 사회 문화와 국가와 국제관계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를 망라한다. 
대개 설법은 한갓 개인 심성의 문제와 사회 도덕만을 문제 삼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불법에 있어서 설법은 그렇지 않다. 생명과 일체 존재의 근원 자체를 밝게 열어 보인다. 그래서 인간사회의 도덕, 질서뿐만 아니라 사회발전 원리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불법은 원래 있는 본래의 원리를 밝혀 줌으로써 일차적으로 개인과 사회의 원초적인 양태, 즉 실상 진리를 제시해 주며, 다음에 현실적 인간이나 사회적 사상을 원초적 양태에 비추어 보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현실적 개혁의 당위성과 그 방법을 명료하게 제시해 준다. 
이런 점으로 설법이 인간 사회의 제반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해결 목표와 방법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설법이라고 말할 수 없다. 
설법을 전법륜轉法輪, 즉 법륜을 굴린다고 한다. 원래 법륜이라는 말은 법의 수레바퀴라는 뜻인데 이것은 사천왕이 가지고 있는 윤보에서 따온 말이다. 사천왕은 윤보를 굴려서 개울을 메우고 길을 평탄하게 하며 그의 국토를 통치한다. 윤보가 대지의 장애물을 없애고 평탄하게 하듯이 법륜이 능히 중생의 마음에 번뇌바다를 없애주는 것이다. 삼독의 가시덤불을 없애고 교만과 사상의 산을 무너뜨리며 의심과 애욕의 늪과 물결을 말려 버리는 것이다. 
삼독의 구름을 헤쳐 버리니 자성의 태양과 정심불국이 그 앞에 개벽하는 것이다. 법륜을 굴림으로써 이와 같이 삼악도가 변해 연화지가 된다. 중생세계가 불국토로 바뀌는 것이다. 법륜은 중생의 마음 땅에, 중생의 가지가지 계층사회와 현실 문제 위에 굴려 나아갈 때 비로소 불법의 광명은 온 법계에 두루 퍼지는 것을 믿게 되는 까닭이 여기 있다. 
종교가 역사적 사회적 현실문제에 대해 아무런 대책도 내지 못하거나 오히려 그것은 종교가 상관할 영역이 아니라고 외면한다면 그야말로 보물을 손에 쥐고 썩히는 격이다. 불법의 진리가 아무리 풍성하더라도 설법으로 그것을 내어 쓰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다는 것일까. 하물며 종교인들이 전통적 경전의 문구만 외울 뿐 그 진리를 오늘의 현실 위에서 살려 낼 안목이 없다면 그런 종교는 한갓 사람들의 귀를 위로해 주는 앵무새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다. 
설법이 없는 사회를 생각해 보자. 마치 태양을 잃어버린 암흑처럼 생명의 진리의 빛을 만나지 못하는 암흑세계가 나타난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사는 것이 무엇이며, 역사와 사회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밝혀주는 빛이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생명의 암흑시대가 싹트게 되고, 도덕의 암흑시대가 시작되고, 역사의 암흑시대가 진행되며, 사상의 암흑시대가 열려  오고, 생명의 방황시대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오늘의 시대를 인간 정신의 방황시대라 하며 사상의 무정부시대라 하며 혼돈의 시대라고 하는 것은 실로 참된 설법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마땅히 법문은 열려야 하며 법의 수레바퀴는 쉴 사이 없이 영원히 영원히 굴려야 한다. 설법만이 인간과 역사의 세계를 구제해 주는 것이다. 혹자는 물질과 경제와 과학기술이 인간과 시대를 결정한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 물질과 과학기술이 인간을 이끌어 갈 때 바로 인간이 물질이 되고 과학기술의 도구가 되며 경제발전의 부속물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물질이 되고 가정과 사회는 이익과 물질의 집합장이 되며 국가는 이욕 충족의 도구밖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오늘날 세계적인 혼란은 바로 참된 설법이 없는 데서 유인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보는 것이다. 

누가 법을 설하는가
법은 깨달은 사람이 설한다. 진리를 아는 사람이 설하는 것이다. 법을 깨달은 분은 부처님이시고 대보살이며 또한 조사이시다. 이분들이 진리의 문을 열어 법의 광명을 이 세간에 쏟아 놓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중생을 진리로 인도해 제도하는 성자는 불보살뿐이실까. 
그렇다 불보살뿐이시다. 그러나 이 불보살은 불국토나 그밖에 성스러운 곳이라고 간판이 붙은 그곳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다. 일체처에 계시는 것이다. 경에 이르시기를 “진법계 허공계 시방삼세 일체불찰 극미진마다 각각 불가설불가설 불찰 극미진수의 광대한 불세계가 있고 그 낱낱 불세계에 염념 중에 불가설불가설 불찰 극미진수의 부처님이 계시다.”하였으니 실로 부처님은 일체 국토 무변 세계에 티끌마다 아니 계신 곳이 없다. 
어느 곳이든 부처님 아니 계신 곳을 생각할 수 없다. 아니 일체처와 일체 중생이 부처님이시며 일체 처, 일체 중생의 숨결과 몸집과 운동이 설법이다. 일월성신 산천초목이 설법하는 것이다. 참으로 일체 세계 일체 시중에 부처님이 계시고 법을 설하고 계시다. 
허공이 법을 설하는 것이다. 바다가 법을 설하는 것이다. 산하대지가 법을 설하는 것이다. 산새와 꾀꼬리와 비둘기와 기러기와 갈매기와 물새가 법을 설하는 것이다. 촌아낙네가 법을 설하고, 코흘리개 동자가 법을 설하고, 주정꾼이 법을 설하고, 통곡하는 상제가 법을 설하고, 병자가 법을 설하고, 송장이 법을 설한다. 뇌성 번개가 법을 설하고 복숭아꽃이 법을 설하며 솔바람 소리 내지 귀뚜라미, 다람쥐가 법을 설한다. 그러하거늘 어찌 선량한 우리의 형제, 다정한 우리 벗, 따뜻한 우리 가족, 자비로운 우리 스승님들이 어찌 법을 설하지 못하실까. 그 모두가 법문의 열쇠를 손아귀에 쥐고 자비로운 법을 설하고자 우리 둘레에 와 계신다. 

어떻게 청법하는가
원래 법문은 산하에 가득하고 허공에 가득 차며 우주에 넘쳐 있으니 그 법문을 능히 듣지 못하는 자가 없는 것이다. 다만 스스로 자기 귀를 가리고 자기 눈을 가리기 때문에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고 그 설법을 듣지 못하는 것이다. 마음을 비울 때 곳곳에서 선지식을 만나고 곳곳에서 제불의 설법을 들을 수 있다. 아집과 편견과 삼독에 빠져 있을 때는 선지식을 만나고도 못보며 설법을 듣고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참으로 설법을 듣는 자는 먼저 그 마음을 비워 그릇된 소견을 모두 털어 없애고 아집과 아만의 산을 허물어 버려야 한다. 
예부터 전해 오는 “마음을 비워야 부처 시험에 급제한다”는 말은 바로 이 뜻이며, 여러 경전에 부처님께 법을 청하였을 때 부처님께서는 “자세히 들어라”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마음을 비워 온전한 설법을 들으라는 뜻이다. 

제주불교신문  jejubulgy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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