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당 봉려관 스님 1911년 법정사 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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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당 봉려관 스님 1911년 법정사 창건”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04.17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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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한국여성의 선구자 해월당 봉려관 스님 ⑮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관음사가 주최하고 탐라성보문화원이 주관한 해월당 봉려관 스님의 발자취 세미나에서 전 동국대 선학과 강사 혜달 스님이 주제 발표한“근대한국여성의 선구자-해월당 봉려관 스님”을 본지에서 다시 소개하게 되었다. (단, 지면의 제약으로 각주는 부득이하게 생략해서 실었다.) <편집자주>

 

4월 불상을 봉안하고 재(齋)를 시행(施設)했다. 그러나 토착인 오백여명이 몰려와 모두 극력하게 봉려관을 쫓아내며 말하기를 “이런 물건을 이대로 두면 세상 사람들을 미혹하게 해서 속여 세상을 어지럽게 해 반드시 큰 화를 불러올 것이니 쫓아내야 한다.”고 하면서 집에 불을 질러 버렸다. 봉려관 스님은 거의 불에 타 죽을 뻔 했지만 겨우 불을 피해 나오니, 천지간에 집 없는 객이라 할 만 하다. 

갈 곳 없이 걸어서 가다보니, 이미 백록담 주변에 가 있었던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7일간을 아무 것도 먹지 못해 거의 기진맥진한 상황에서 서원하기를 “중생을 제도하지 못한다면 이곳에서 죽겠습니다.” 그리고는 가파른 계곡 아래로 몸을 던져버렸다. 기이하도다! 수천마리의 까마귀 떼가 나의 옷을 물어 나를 구제하였다. 또 한 노인이 나타나 일러주기를 “산천단으로 내려가면 저절로 좋은 인연을 만나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잡목 덤불이 우거진 곳이어서 옷을 꿰맬 것조차 없어서, 입은 옷 그대로 간신히 산천단에 도달하니, 남달리 보이는 운대사라는 스님이 있었다. 운대사는 “그대를 찾은 지 오래되었는데 오늘에야 다행히 만나게 되었다.”고 하면서 가사를 내어서 주었다. 이 무슨 징조인가? 해를 넘겨 1909년 봄에 한라산에 건물을 지어 사찰을 창건했다.

(4.3사건으로 인하여 더 이상 조각하지 못하고 고심하던 차, 병환으로 오이화 스님은 열반하시다)

이것이 <관음사 봉려관 비문>원문이다. 진원일의「고대사찰과 아라리 관음사」중 ‘관음사 안봉려관 비문’과 몇 개의 誤字 및 탈자 등을 제외하고 내용상 거의 동일하다. 그런데 이 비문이 후에는 내용이 가감된 후 ‘관음사 역사’라는 제목으로 유통되었다. 
비문 끝에 첨부된 글에 의하면, <관음사 봉려관 비문>은 오이화 생존 시에 이미 비문(碑文) 작성이 완료되었지만, 4‧3사건으로 인해 비(碑)를 刻하지 못하다가, 오이화가 입적한 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이 비석은 서경보측에 의해 수난을 당한 것으로 유추한다. 비석의 세로 두께를 쪼개고 원래의 비문을 갈아버린 후, 비석 뒷면에는 오이화 시대에 작성된 것으로 사료된 원래의 비문에 서경보의 頌과 약간의 글을 추가해서 서경보 ‘謹書’라 하고, 비석 앞면은 서경보의 글로 새겨 채웠다는 전언(傳言)이 있다. 이것마저도 관음사 밖의 밭에 버려져 있던 것을 관음사로 다시 모셔와 세워 둔 것이다. 현 백양사 방장 지선의 구술에 의하면, 지금의 부도전은 당시 관음사 주지였던 지선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고 버려져 있던 비석을 찾아다가 한 곳에 모시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즉금 한라산 관음사에 소재한 봉려관의 비문은, 후에 서경보 측이 가감(加減)한 결과물이다.  
원(原) 비문의 작성자와 관련해서는, <관음사 봉려관 비문>원본에도 ‘지은이’ 표기가 없다. 회명 혹은 오이화로 유추되지만, 필자는 오이화 쪽에 무게를 둔다. 하지만 향후 비문 지은이가 명확히 밝혀지기를 고대한다.  
관음사 창건년도를『晦明文集‧濟州島 漢拏山 法華寺 尼師 蓬廬觀 碑銘 幷書』(1943년 작성)는, “무신년(1908) 봄에 처음으로 관음사를 한라산 북쪽에 창건하니, 비로소 불법이 횃불처럼 섬 전체를 휘황하게 비추었다.”(p.178)고 한다. 회명이 언급한 관음사 창건연도가 <관음사 봉려관 비문>(1909년 봄)과  다르다. 필자는 이것을 <관음사 봉려관 비문>작성자가 회명이 아니라는 방증의 하나로 본다. 또『회명문집』에 이 비문과 관련된 기록물 및 기록이 없다는 것도 회명을 비문 작성자로 보지 않는 근거 중 하나이다. 참고로『회명문집』에는 봉려관의 7齋文도 없다. 봉려관과 회명의 유대관계를 감안해도 이는 이상하리만큼 이해가 불가(不可)한 부분이다.
물론 오이화가 1950년 입적하기 전 7년간 병중에 계셨다고는 말하지만, 비문은 해월당이 입적한 후 작성되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해월당 비석이 늦게 건립된 이유는, 해월당의 입적 연유(緣由)와 연관시켜 봐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해월당 입적 후 바로 비석을 세울 수 없는 정치사회적 여건이 형성되었고, 해방 후에는 비석 건립을 주관할 오이화가 병중이어서 비석이 건립되지 못하다, 4‧3사건으로 관음사가 전소되어 관음사 대중은 모두 중앙포교당에서 지냈다. 오이화 역시 포교당에서 병상에 있다가 입적을 한다. 해월당의 비석은 이런 저런 당시 상황 때문에 건립이 지연된 것으로 보인다. 

6. 법정사 - 항일운동실천
해월당 봉려관은 1911년 법정사를 창건한다. 봉려관을 제외시키고 1918년 법정사 항일운동을 언급하는 것은 무리이다. 법정사 항일운동은 해월당이 왜 법정사를 창건했는지? 이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1) 해월당 봉려관과 법정사 창건
「제주도 아미산 봉려관의 기적」에 이르길,

봉려관은 열성으로 공부를 하며 전도에 힘을 써서 신도도 많이 늘었으며, 法定山에 法돌庵이라는 것을 일으키고, 다시 아미산에 관음사를 창건하였다 함은 여기 기록한 바와 같더라.

관음사 창건과 법정사 창건시기의 선후가 바뀐 듯하다. 법정사를 봉려관이 창건했다는 기록이다. 법정사 창건연대와 관련해서, 이은상의『탐라기행』에는,

다음 해(1911) 9월에 법정암이란 것을 창건하였다. 

법정사는 1911년 9월에 창건된 것이다. 그렇다면 해월당은 법정사를 왜 창건한 것인가? 이것은 1909년 대흥사 항일운동과 무관하지 않다. 안광호는,

봉려관 스님이 제주도에서 항일운동 하는 사람 숨겨주려고 법정사를 지었다. 

1983년 필자의 노스님 안광호의 구술이시다. 당시 안광호는 필자에게 위와 같이 분명히 말씀하셨다. 법정사 창건과 대흥사 항일운동이 연결선상에 있다는 것은 법인도 언급한 적이 있다. 1989년 안광호 49재 기간 동안 필자가 부산 보덕사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때 법인이 필자를 앉혀놓고 봉려관에 대해 3일에 걸쳐 말씀하셨는데, 이때 봉려관이 항일운동하신 것을 말씀하시던 중, 필자가 “노스님께서 봉려관 스님이 항일운동 하는 사람들 숨겨주려고 제주도 법정사를 지었다고 말씀하셨어요.”라고 말하자 법인은, 
봉려관 스님이 항일운동을 하신 것은 대흥사 때문이다. 항일운동 하는 사람들이 죽은 것을 본 것이다. 봉려관 스님은 군자금도 대흥사에 여러 번 가져다주었다. 항일투사다. 그래서 죽게 됐다.

1909년 관음사 창건을 대흥사에 보고 하러 갔던 봉려관은 마침 심적암에서 일어났던 항일의병들의 죽음을 본 것이 확실하다. 이때 발아된 봉려관의 항일의지가 향후 봉려관으로 하여금 수차에 걸쳐 대흥사에 군자금전달을 하게 계기가 되었고, 그리고 대흥사에서 벌어진 이때의 죽음 광경 때문에 해월당이 당시 지리상 인적과 비교적 동떨어진 외떨어진 장소를 법정사 창건지로 선택한 것이다. 법정사 창건은 봉려관이 독립운동가의 인명(人命)을 최우선시(最優先視)했다는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해월당은 대흥사 심적암 항일의병참사에서 교훈을 얻어 생명을 부지하면서 독립운동 하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2) 해월당 봉려관과 항일운동 
해월당 봉려관의 항일운동방식과 관련해서는 많은 구술이 있었다. H스님은,

일본 대판 외삼촌 함덕출신 김순문에게 들었고, 동경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게서도 들었다. 우리 삼촌은 관덕정 유도장에서 유도를 하신 분이었다. 일본 대판에서도 유도를 했다. 외삼촌이 출가한 나를 보고 “우리 집안에도 스님이 났구나”하면서, 외삼촌이 그러시는데 한국에 옛날에 관음사를 일으킨 여자 스님이 있는데 화북분이라고 하시면서, 그분이 독립투사다. 당신이 탁발을 해 돈을 모아서, (정방사 수보스님 아버지는 우리 같은 동네 서호동 사람이라) 수보스님한테도 들었는데, 한라산 봉려관스님 해 놓은 법정사에 좀 계셨는데,……봉려관 노스님이 돈을 모아서 수보스님 아버지 강(방?)스님한테 주면은, 돈을 맹탱이로 싸서 메고 바다에서 하루종일 낚시를 하면, 독립선이 돈 받으러 온다. 어둑어둑하면 배가온데, 그러면 돈을 그리 전해 주었다.……어둑어둑해지면 배가 온데, 그러면 “고기 잡았어요?” 그렇게 물으면 배에서 고기를 넘겨주고 고기값으로 독립자금이 든 맹탱이를 배에 있는 사람에게 넘겨주었다고 나한테 우리 삼촌이 말했다. 한 달에 두어 번씩을 그렇게 했는데, 이 말은 우리삼촌도 이렇게 말했고, 우리 아버지도 똑 같은 말을 나한테 하셨다. 우리 아버지가 내가 스님이 돼서 가니까 나한테 3배를 하시고, 우리 집안에도 스님이 나왔다 하시면서 “옛날에 제주도 부처님 법을 일으킨 사람이 있다”고 하시면서, “여자 스님인데 독립투사다. 수보 아버지가 우리 동네 서호사람이야. 여자스님이 온데 다니면서 탁발을 해가지고 수보스님 아버지에게 주면, (그니까 봉려관 스님이) 돈을 가마태기에 싸서 가지고 가서 한라산 절에서 만나서 강(방?)스님한테 돈을 건네주면, 수보스님이 맹탱이에다 담아서 가져가서 독립선을 기다렸다가 건네주었다.”고 하셨다. 

필자가 “같은 시기에 아버지와 삼촌을 만나셨어요?” 묻자, H스님은 또 이르길,

우리아버지가“제주불교를 일으킨 여자스님이 있다. 이름은 모르겠고 그 스님은 화북사람인데 독립투사다. 그 스님이 군자금을 대 준 사람인데, 그 군자금을 받아서 전해준 사람이 우리 동네사람 강(방?)스님이다.” 이 말은 아버지도 삼촌도 똑같이 말씀하셨다. 만난 시기는 다른 시기였다. 이 이야기는 내가 분명히 들었다. 수보스님 돌아가시기 전에 우리아버지도 독립투사였다고 나한테도 말했다. 돈은 봉려관 스님이 대고 수보스님 아버지는 전달만 했다. 이 말은 분명한 말이다. 우리 아버지도 제주도 불교를 일으킨 여자 스님이 있는데, 그 스님이 독립군 군자금을 댄 사람이다. 여자인데도 대단한 사람이다고 나한테 아버지가 분명하게 말을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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