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그 진실한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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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그 진실한 언어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04.17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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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진의 ‘길 위에서’ (17)

“차도 드시고, 책도 읽으시면서 편안하게 기다리세요.”
내 공간에서 지인을 기다리는 보살님에 대한 배려로 나는 차를 드리고 책도 권했다. 그다지 친밀한 관계가 아닌 분들께 나는 보통 그렇게 차를 한 잔 드리고 책을 권해드리고는 나도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다. 까닭은 이렇다.
첫째는 내가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고, 두 번째는 혹시 낯이 선 상대방이 불편해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약간의 무관심을 표시하는 나만의 방법이다. 그러면 보통은 차를 홀짝거리면서 벽 둘레둘레 가득한 책들 가운데 하나를 꺼내서 보는 척이라도 한다. 그런데 그 낯선 보살님은 그 많은 공간을 다 놓아두고 하필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는 내 턱 밑에 자리를 잡고 앉아 말을 건다. 처음에는 자판을 더 열심히 두드리며 접대용 멘트로 방어를(?) 했다. 그러다 귀에 꽂히는 이 말에 자판 두드리는 걸 멈추었다. 그 소리가 이상하게도 단순한 푸념으로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가 책을 정말 싫어해요. 저는 가만히 앉아서 책 읽는 걸 못 견뎌요. 책이라고는 한 권도 안 읽는 사람이에요. 정말로요!”
책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사람 없이는 살아도 책 없이는 못 살 것 같은 나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책을 정말 싫어한다는- 보살님을 나는 빤히 쳐다보았다. 그 말 뒤에 무언가가 있다는 직감이 들어서다.  
“그런데 제가 법화경을 읽었어요. 책이라고는 생전 처음 읽는 내가 법화경을, 그 자리에서 내리 세 번을 읽었지요. 처음 읽어보는 건데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아무튼 펑펑 울었어요. 28품 읽는 내내 울면서 읽었어요. 두 번째 세 번째 읽으니 좀 진정이 되더라고요.”
눈물도 눈물이지만 책 읽는 것을 너무너무 싫어하던 자신이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앉아 책이라는 걸 내리 세 번을 읽었다는 걸 지금도 신기해하시는 것 같았다. 
“도대체 뭘 아시고 우신 거예요? 어느 부분이 그렇게 슬프던가요?”
생각해보면 굳이 묻지 않아도 되는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 보살님은 담담하게 대답을 하신다. 
“그냥~ 그때가 힘들었던 때였어요.”
왜 아니 그렇겠는가? 누구든 사람으로 한 평생을 산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힘에 겨운 일인가? 그래서 우리는 자꾸 취醉하려고 한다. 돈에 취하고, 명예에 취하고, 가지가지 욕망에 취하고 하다못해 명상에도 취하고…….
지금은 세상의 허망한 재미는 모두 뒷전으로 하고 손녀를 키우는 것을 보람으로, 기도를 기쁨으로 알고 사신다는 보살님의 체험담을 나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나도 그때 그랬었으니까.
언젠가 한번은 궁금한 마음에 관무량수경을 펼쳤다가 펑펑 운 적이 있다.  물론 왜 울었는지 모를 일이다.  
또 한 번의 알 수 없는 눈물은 누군가에게 받아서 벽에 (장식처럼)걸어두었던 족자에 쓰인 글귀를 올려다보다 그만 주륵주륵 눈물을 흘렸던 일이 있었다. 단지 법화경의 한 구절이라는 사실을 알 뿐 지금도 그 깊은 뜻은 알지 못한다.
               
每自作是意以何令衆生得入無上慧速成就佛身
 
불자도 아니었고, 불교도 모르고 ,책 읽는 것조차 싫어하던 보살님과 경전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내가 흘린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어쩌면 우리 안에는 우리 자신도 모르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진실한 언어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쓰고 보니, 읽고 보니 진실한 눈물 한 방울보다 못한 글을 쓴다고 자판을 톡톡 두드리던 손이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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