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려관 스님 수차에 걸쳐 군자금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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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려관 스님 수차에 걸쳐 군자금 전달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04.24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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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한국여성의 선구자 해월당 봉려관 스님 (16)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관음사가 주최하고 탐라성보문화원이 주관한 해월당 봉려관 스님의 발자취 세미나에서 전 동국대 선학과 강사 혜달 스님이 주제 발표한“근대한국여성의 선구자-해월당 봉려관 스님”을 본지에서 다시 소개하게 되었다. (단, 지면의 제약으로 각주는 부득이하게 생략해서 실었다.) <편집자주>

 

 

구술자가 구술한 대로 옮겨 실었다. 봉려관이 군자금을 대는 방식으로 항일운동을 했다는 증언이다. 그리고 그 군자금은 수보스님 아버지 방동화에게 전달되었고, 방동화는 이 군자금은 제주도가 아닌 육지에 있는 독립운동 중앙본부에 전달된 것으로 사료된다. 봉려관이 수차에 걸쳐 대흥사에 직접 전달했다는 군자금은, 1909년 이후에는 대흥사 원응(圓應)에게 전달된 것으로 유추한다. 그러나 만당(卍黨)이 조직된 이후에는 박영희를 통해 만당으로 흘러들어간 것으로 추정한다. 그렇다면 해월당의 항일운동은 제주지역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고, 중앙의 항일조직과 연계된 것이 분명하다. 유추하자면,

1, 해월당 봉려관 – 방동화 – 독립군 배 – 육지항일운동조직.
2, 해월당 봉려관 – 대흥사 원응 – 중앙항일운동조직.
해월당 봉려관 – 대흥사 박영희 – 만당 – 항일운동조직.
해월당 봉려관 – 대흥사 박영희 – 항일운동조직. 
3, 해월당 봉려관 – 방동화 – 제주 법정사 항일인사.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해월당의 항일운동은 많은 사람이 증언한다. 안광호는,

봉려관 스님은 항일 운동하는 사람들을 뒤로 몰래 도왔다. 불사를 핑계로 불사금을 신도들한테 걷어서, 불사에는 돈을 조금 쓰고, 남은 돈은 항일 운동하는 사람들에게 몰래 가져다주었다. 대흥사에도 군자금 가져다주러 여러 번 갔다.

D스님은,

봉려관 스님이 일제 강점기시대에 항일 운동하는 사람들을 법정사에 가서 돌봐주었고, 위험했을 때는 다 숨겨주고 양식도 다 대주었다고 들었다. 구속 된 후 형을 살고 나와서 법화사 창건 때 다들 조력을 했다고 들었다. 방동화 스님께서 이르시길, 항일운동을 하려고 일부러 처사행세를 했는데, 그래서 방처사라 스스로 불렀고 타인도 그렇게 부르고 했으며, 봉려관에게 힘을 많이 빌었다고 말씀하셨다. 방동화 스님에게서 들은 바로는 여성이면서도 정의파라고 하셨다. 음성적으로 도왔지만, 친일처럼 보인 것은 회명스님 영향이라고 했다. 봉려관 스님이 무오 독립 운동할 때 뒤에서 많이 후원해 주었다고 들었다. 봉려관 스님은 항일운동 하는 사람들에게 쌀, 돈을 대주고 때때로 사람도 보내주고 했다. 스승님들에게 어른들에게 봉려관에 대해 좋은 소리만 들었지, 나쁘다는 소리는 듣지를 못했다.  

K1스님은,

봉려관 스님이 항일운동을 하신 것은 틀림없습니다. 군자금 조달 같은 것이다. 김석윤 스님은 월하리 분인데, 석윤 스님과 연관이 있어서 교분이 있어서 항일 운동하는데 보태주었다고 알고 있다. 자금이라든가 여러 가지 도와주셨다고 들었다. 봉려관 스님이 항일 운동했다는 소리는 자주 들었다. 방동화 스님과 봉려관 스님이 손잡고 항일운동을 했다고 들었다. 내가 어릴 때니까 위의 분들이 항일 운동하는 것을 확실하게 본 것은 없다.

J스님은,

진원일 스님에게 봉려관 비를 만들 비문이 있었다. 8절지 3장 분량인데, 비문 내용은 크게 3가지이다. 대흥사에서 계 받는 이력, 관음사에서 돌아가시기까지의 내용, 항일운동 내용도 있었다. 봉려관 스님이 법정사에 계셨다는 내용이 기억에 있다. 이전에 봉려관 스님 비문이 없으니까 진원일 스님이 쭉 써 내려갔다. 봉려관 관계 자료를 진원일 스님이 나한테 주셨다. 이것을 K스님 자기 절에다 세우겠다고 달라고 해서 다 주었는데, 세우지 못하고 입적해 버렸다. 

구술자가 가장 많이 언급한 것은 “봉려관 스님은 항일운동을 앞장서서 하지 않으셨다. 봉려관 스님이 뒤에서 군자금 같은 것을 댔다는 소리는 윗대 스님들에게 들었다.”인데, 구술을 참조하면 봉려관은 내면적 항일을 한 항일인사이다.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이 실제로 실천되기까지는 다양한 형태의 항일운동방식이 모여져서 항일봉기로 이어졌다고 본다. 위의 구술을 종합하면, 해월당은 법정사 항일운동 하는 사람들에게 쌀, 돈을 대주었고, 때때로 사람도 보내주었으며, 위험했을 때는 다 숨겨주는 등, 법정사에 가서 살피고 해월당의 힘이 필요한 부분은 힘을 보태어 해결해 준 것이다. 때문에 법정사 항일운동에서 봉려관의 역할이 도외시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정사 항일운동 연구자 일부는 수차에 걸쳐 혜전이 법정사 항일운동 관련 세미나에서 봉려관의 중요성을 발언했지만, 아예 귀담아 듣지 않았고, 구술을 채록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 결과 해월당의 항일운동은 이들 귀와 눈에는 보이지 않았고; 학자가 아니어서 발언에 조리가 없는 일반인 혜전의 발언을 짜증으로 일관한 학자도 있었다. 해월당을 아예 법정사 항일운동사에서 묻어 버리려는 시도를 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필자의 이런 생각이 지나치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법정사 항일운동사는 일부 인사의 전유물이 아니다. 법정사 항일운동 연구자들은 더 많은 자료를 찾기 위해서 고군분투해도 모자라는데, 연구당사자 앞에서 법정사 항일관련내용을 구술해도 이를 무시한 이유가 무엇인가? 법정사 항일운동관련자 모두를 평등하게 연구한 결과가 도출되어, 법정사 항일운동이 전 국민의 관심을 갖는 시기가 오길 제주학자들에게 고대하고 기대해 본다.       
종합하면, 해월당 봉려관의 항일운동의지는 대흥사 심적암에서의 항일의병 참상에서 비롯되었고, 대흥사 항일운동의병참사는 해월당 봉려관의 향후 항일운동방식에 생명존중이 우선시 된 연유가 되었다고 사료된다. 해월당은 생명을 부지하면서 하는 항일운동에 역점을 두었고, 그래서 지리적으로 비교적 안전하다고 생각한 법정사를 창건해서 이곳을 항일운동인사의 거주지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법정사 항일운동에는 자금이 많이 소용되지 않았다는 견해를 역설하면서 고의적으로 봉려관의 역할을 홀대하는 것은 봉려관에게 불공평하다. 방동화는 연구하면서 일제강점기 항일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방동화와 가장 많은 왕래를 했던 봉려관은 왜 연구를 하지 않으신 것인지 되묻고 싶다. 
30여 년 동안 군자금조달 등 숨어서 항일운동을 조력한 자는, 직접적인 항일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또는 후대 문도의 구술채록조차 없이 아예 도외시해 버리거나 혹은 제주 항일운동관련 세미나에서 이견을 제기해도 이를 무시해 버리는, 이런 불공평한 대우는 앞으로 없어야 한다. 법정사 항일운동연구는 평등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독립운동은 표면적으로 대 놓고 할 수 있는 운동이 아니다. 일종의 비밀 결사대처럼 지하운동이었다. 노출되면 안 되는 조직이기 때문에 내면적으로 독립운동을 한다하더라도 겉으로 드러낼 수가 없는 것이 항일운동이다. 항일운동에는 내면적 항일운동이 있고, 표피적 항일운동이 있다. 감옥이 항일투사를 판가름하는 기준으로 삼는 즉금의 실정이 안타까운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법정사 항일운동연구는 특정인물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을 드러내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이를 연구하는 학자에게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항일운동자가 더 있는지 세심히 살펴야 할 것이고, 더욱더 세심한 구술채록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표피적으로 항일운동을 한 인물을 제주 항일운동과 관련된 것마다 모두 억지로 연결시키려는 일부 학자의 노력은 이제 지양시켜야 마땅할 것이고, 내면적 항일운동인사를 찾는 것에 고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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