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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 두륜산 대흥사(大興寺) (1)
서산대사와 제자인 사명당, 뇌묵당 세 분의 진영을 모신 사당인 표충사(表忠祠)

 1604년 1월 어느 날 묘향산 원적암에서는 85세 노구의 서산대사 휴정(休靜, 1520-1604) 스님이 제자들을 불러 마지막 설법을 하였다. 그리고 제자인 사명당 유정(惟政)과 뇌묵당 처영(處英) 스님 등에게 자신이 입고 쓰던 가사와 발우를 해남 두륜산에 두라고 부탁했다. 당시 서산대사가 계신 평안북도의 묘향산에서 보면 전라남도의 해남 두륜산은 조선의 북쪽 끝에서 남쪽 끝으로 이천 리 가까이 떨어진 아득히 먼 곳이었다. 그런 곳에 스승의 발우와 가사를 두라니 제자들은 무슨 이유인지 몰라 당황했다. 못내 이유가 궁금해서 스승께 그 이유를 여쭈니, 서산대사는 “그곳은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들어오지 않는 곳(三災不入之處)이고, 만세토록 훼손되지 않는 땅(萬年不毁之地)이며 종통이 돌아갈 곳(宗統所歸之處)”으로 자신의 의발을 보관할만한 곳이라고 말했다. 서산대사가 입적하자 다비 후 제자들은 사리는 묘향산 보현사와 안심사에, 영골은 금강산 유점사에 모시고, 금란가사와 발우는 스승의 유훈대로 해남 대흥사에 모셨다. 

조선후기에 제작된 청허당 서산대사 진영 (통도사 성보박물관 소장)


 서산대사는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 온 선조의 부탁으로 70대 노구를 이끌고 승병을 모아 평양 탈환 작전에 참가하여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가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그의 제자인 사명당과 뇌묵당 역시 스승과 함께 큰 공을 세우고 사명당은 전란이 끝난 후 일본에 사신으로 가는 등 큰 활약을 했다. 이렇다 보니 전란이 끝난 후 조정에서는 불교와 승려들에 대해 이전과 다르게 대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대 선교 양종의 최고 고승이었던 서산대사의 의발이 대흥사에 전해졌으니 땅끝 해남의 작은 절이었던 대흥사는 이후 큰 도량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조선 후기 대흥사에서는 13분의 대종사와 13분의 대강사를 배출하는데 이들은 서산대사의 법맥 중 가장 번창한 편양 언기(鞭羊 彦機) 스님과 소요 태능(逍遙 太能)계 스님들이다. 13분의 대종사나 13분의 대강사 중 일반인에게 이름이 알려진 분으로는 강진에 귀양 와 있던 다산 정약용 선생과 교유했던 대강사 중 한 분인 혜장선사와 대종사 중 막내로 추사 김정희와 교유한 초의선사 의순(意恂, 1786-1866) 스님이 있다. 
 대흥사가 조선시대 후기에 큰 사찰로 발돋움하고 오늘날 세계문화유산 산사 중 하나이자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로 자리매김한 것을 보면 앞서          ‘종통이 돌아갈 곳’이라고 말한 서산대사의 혜안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서산대사의 음덕으로 대찰이 된 대흥사이므로 서산대사를 기리는 것은 당연하지만 사찰 경내에 유교 형식의 사당을 만들어 추모하는 것에 의아해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내력을 알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1791년 대흥사 안에 서산대사를 기리는 표충사(表忠祠)와 함께 세워진 표충사 기적비에는 다음과 같이 그 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1788년(정조 12) 대흥사의 천묵(天默)과 계홍(戒洪) 두 스님은 대흥사에 서산대사의 의발이 전하는데 서산대사가 그의 제자인 사명대사처럼 추모되지 않는 것이 안타까워 정조대왕에게 서산대사와 제자인 사명당과 뇌묵당 세 분의 영정을 모시고 싶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정조 임금은 임진왜란 때 활약한 세 분 스님의 충정을 치하하며 사당을 짓게 하고, 표충사라는 이름을 직접 써서 하사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봄에는 예조의 관리들을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 정조가 금분으로 직접 써서 하사한 표충사(表忠祠)의 마지막 글자 ‘사(祠)’자는 ‘절 사(寺)’가 아니라 ‘사당 사(祠)’자이다. 즉 대흥사 남원에 자리한 표충사는 유교에서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처럼 대학자의 위패를 모셔서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는 서원처럼 서산대사 등 세 분의 스님에게 제향하는 사당인 것이다. 당시 국시가 유교이다 보니 국가에서 서산대사를 기리는 형식은 불교식이 아닌 유교식을 취한 것이다. 대흥사에는 선조 임금이 내린 교지도 있고, 실제로 서산대사가 임진왜란 때 혁혁한 공을 세웠고, 정2품인 당상관의 관직도 받았기 때문에 꼬장꼬장한 유학자들이나 관리들도 반대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다만 밀양에 있는 사명대사를 기리는 표충사가 이미 있었는데 정조대왕이 스승과 제자의 사당에 같은 이름으로 붙인 것은 스승과 제자가 함께 나라에 충성한 것을 기리는 특전이었다고 기적비는 전한다. 어쩌면 묘향산에서 이천 리나 떨어진 대흥사에 자신의 의발을 보관하라고 한 이유가 이처럼 억압의 시대에도 불교가 유구히 이어지라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또한 서산대사가 일찍이 만세토록 훼손됨이 없는 곳이라고 예언했듯이 임진왜란, 병자호란은 물론 일제강점기를 지나 6․25 전쟁에도 대흥사는 전혀 피해를 받지 않았다. 정말로 서산대사의 혜안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서산대사의 의발을 모시고 있는 대흥사가 언제 처음 만들어졌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창건에 관해 참조할 수 있는 자료로는 「죽미기(竹迷記)」 ,  「만일암고기(挽日菴古記)」 ,  「북암기(北菴記)」  등이 있는데, 혜장선사가 이 자료들을 종합하여 쓴 『대둔사지』에는 창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응진전 앞 삼층석탑


 첫째, 426년 신라의 정관(淨觀)존자가 창건하여 ‘만일암’이라 하였고, 508년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 비구에 의해 중건되었다는 기록, 둘째, 514년(법흥왕 1)에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기록, 셋째, 895년(헌강왕 11) 도선국사가 당에서 귀국하여 500곳의 사찰을 짓자고 상소한 후 만들어진 절 중 하나라는 설이다. 이들 자료를 모은 혜장선사는 실학자였던 정약용 선생과 교유하였기 때문인지 사실 확인에 치중하였고, 그 결과 이들 기록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즉 아도화상이 절을 지었다는 시기는 그가 훨씬 이전에 활약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타당하지 않고, 도선국사가 당에 갔다 왔다는 기록은 없으며 895년은 그가 태어난 해라는 점에서 맞지 않다며 고기록을 부정하고 구체적인 이유를 들지는 않았지만 창건 연대를 통일신라 말로 보았다. 현재 절에 전하는 유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보물 제 320호로 지정된 응진전 앞 삼층석탑이며, 그보다 조금 뒤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북미륵암 마애불(국보 제308호)과 삼층석탑(보물 제 301호)이 있다. 응진전 앞 삼층석탑은 그 비례나 조각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북미륵암 마애불과 삼층석탑은 고려시대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종합해서 보면 혜장선사의 예측대로 대흥사는 통일신라시대 말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고려시대에 대흥사의 기록이 그다지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는 사세가 그다지 크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결국 오늘날처럼 대흥사가 대찰로 발전하게 된 것은 서산대사의 의발이 전해졌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대흥사에 가면 서산대사의 행적을 찾아보고, 그분의 남긴 시처럼 후대를 위한 그의 마음을 생각해보자.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제주불교신문  jejubulgy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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