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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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걸음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05.15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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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진 에세이 ‘길 위에서’ (19)

며칠 전 우리 집 닭장에서 병아리가 태어났다. 축하해 주러 닭장에 갔더니 암탉들이 눈알을 빠르게 굴리며 불안해한다. 세상을 좀 살아본 어른 닭들은 뭘 좀 아는 모양이다. 닭장 밖에 존재들이 자기들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것을, 절망적이게는 목숨을 거두어갈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런지 한 순간도 경계를 늦추지 못하고 불안해하고 있다.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뭘 좀 알기는 하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니 그저 모든 상황이 불안할 뿐인, 세상 좀 살아본 닭들이다. 
 오십 보, 백 보겠지만 그래도 사람으로 태어나서 스스로가 무명 중생임을 아는 것이니 다음 생에는 닭들도 부디 진화된 생명으로 태어나라고 빌어주었다.
 몇 생을 학습한 불안인지 불안을 아는 어른 닭들과는 달리 태어난 지 며칠 안 된 병아리들은 뭘 몰라서 천진난만하다. 신나게 “삐약삐약” 소리를 내며 암탉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닌다. 
 탄생의 기쁨도 잠시, 어젯밤에는 대 참사가 일어났다. 뭘 모르는 병아리들이 닭장 그물망 주변에서 노는 것을 족제비가 구멍 사이로 입을 들이밀어 잡아챘고, 이를 구하려던 어미닭마저 참변을 당했다. 생生사死가 그렇게 허망할 수가 없었다. 육도윤회의 고통이 얼마나 생생하게 전해지는지 나도 모르게 부설거사의 사四부浮시詩를 읊조렸다.

거느린 식구들이 대밭처럼 빽빽하고
금은보화가 산더미같이 많아도
마지막에는 외로운 혼백 홀로 떠나가니
잘 생각해 보면 허망한 물거품이라네.
날마다 힘겹게 세상일에 매달려서
벼슬 겨우 높아지면 머리는 백발이네.
염라대왕은 높은 벼슬을 두려워 않나니
잘 생각해보면 허망한 물거품이라네.
비단 마음, 수놓은 입, 뛰어난 말재주
천 글귀 시를 지어 만호후를 비웃어도
다 겁 생에 걸쳐 아만의 뿌리만 늘게 하니
잘 생각해보면 허망한 물거품이라네.
설령 비구름 몰아치듯 설법을 잘하여도
하늘 꽃이 감동하고 바위가 끄덕여도
마른 지혜로는 나고 죽음 면하지 못하나니
잘 생각해보면 허망한 물거품이라네.

 부처님 오시던 날, 부처님은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걸으셨다고 한다. 여섯 걸음에서 한 걸음 더 걸어서 육도윤회를 벗어나고는 천상천하 유아독존! (天上天下 唯我獨尊!)을 외치셨다고 한다. 그 승리의 외침이 귓가에 쟁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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