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 두륜산 대흥사(大興寺)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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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 두륜산 대흥사(大興寺) (2)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05.30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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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사찰순례(86)
<명선> ‘차를 마시며 선에 들다’는 의미로 추사가 초의선사에게 써 준 글

대흥사라고 하면 당연히 떠오르는 스님이 있으니 바로 우리나라 차 문화를 정립한 다성 초의선사( 1786-1866)이다. 법명이 의순(意恂)인데 법명보다는 호인 초의(草衣)로 널리 알려졌다. 차를 좋아하고 차에 대해 공부한 사람이라면 초의선사가 지은 「동다송(東茶頌)」을 읽어보았을 것이다. 「동다송」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차에 대해 시와 비슷한 송(頌)이라는 형식으로 쓴 책으로 차의 역사, 차나무의 품종, 차 만드는 법, 차를 끓이고 마시는 법, 차의 생산지와 품질 등 총 31송을 노래하였다. 토산차에 대해 색깔, 향기, 맛 등이 중국차에 뒤지지 않는다고 찬양하였고, 특히 지리산 화개동(花開洞)의 차밭이 차나무가 잘 자랄 수 있는 적지라고 하였다. 그리고 법도에 맞게 만들어지지 못한 차에 대해서는 “천하에 좋은 차를 속된 솜씨로 망치는 것이 많다.”고 안타까워하였다. 이런 차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사랑은 동갑내기였던 추사 김정희가 제주에 귀양 와 있을 때 추사로부터 끊임없는 닦달을 받는 원인이 된다.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는 30살이 되던 1815년에 만나 죽을 때까지 우정을 나눈다. 나중에 다성(茶聖)이자 대흥사 13대 대종사가 된 초의선사와 조선시대 후기 고증학과 금석학 같은 신학문과 글씨와 그림의 태두가 된 김정희는 어쩌면 처음 만났을 때 서로의 비범함을 꿰뚫어보았을 것이다.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계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대흥사에서 멀지 않은 강진에서 유배 중이던 정약용 선생의 아들 정학연의 소개설이다. 강진으로 아버지를 찾아 갔던 정학연이 아버지의 소개로 초의선사를 만나게 되었고, 그의 깊은 학식에 감동하여 한양에 오면 명사들을 소개시켜주겠다고 약속했고, 초의선사가 한양으로 오자 추사를 소개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은 초의선사가 한양 인근에 있는 수락산 학림암에서 해붕선사를 모시고 있을 때 추사가 해붕선사를 찾아왔고 초의선사와 인사를 했다는 것이다. 어느 것이 맞든 30세에 두 사람은 만났고 동갑내기로 의기가 투합하여 많은 일화를 남겼다. 
김정희는 24세 때 동지를 축하하는 사절단의 대표인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에 가서 당시 청나라의 수도인 연경에 머무르며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元) 같은 당시 최고의 학자들을 만나고 인정을 받았다. 1819년 과거에 급제하여 승승장구, 1836년에는 병조참판, 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기량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55세 때인 1840년 옥사에 연루되어 7년 3개월 간, 햇수로 9년 동안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한참 잘 나가던 정계와 예술계의 거두가 하룻밤 사이에 죄인 처지가 된 것이다. 자신 주변에 모였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신을 멀리 하고, 유배 기간 동안 장과 김치를 담가 제주까지 보내주었던 부인의 임종도 못 보고, 홀로 쓸쓸히 회갑을 맞았으니 그 외로움과 억울함은 어떠하였을까? 그런 마음이 하나씩 모여 예술로 승화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제주도 유배 시절에 완성된 추사체이다. 거칠면서도 힘있는 추사체와 달리 제주도 유배 기간 동안 추사가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에는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추사와는 전혀 다른 면모가 보이기도 한다. 그만큼 두 사람의 우정이 돈독했기 때문이다.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은 한 번도 보지 못했네. 산 중에 바쁜 일이 없을 것이 확실한데, 나 같은 세속 사람하고는 어울리지 않을 심산으로 이처럼 내 마음이 간절한데도 외면하는 건가. 
나는 초의를 보고 싶지도 않고 또한 초의의 편지도 보고 싶지 않으나 
다만 차와의 인연만은 차마 끊어버리지 못하여 이번에 또 한 번 더 차를 재촉하니 
보낼 때 편지도 필요 없고 
오로지 두 해 동안 쌓인 빚을 한꺼번에 챙겨 보내시게. 또 다시 지체하거나 어긋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네.  
이 정도면 빚쟁이가 빚을 독촉하는 것과 거의 다를 바가 없다. 이러한 투정에 초의선사는 차를 보내고 몇 번 제주에 가서 만난다. 한 번은 초의선사가 6개월 간 제주에 머무르다 육지로 돌아가려니  가지 말라고 잡는 추사의 만류와 그 만류를 뿌리치고 떠난 초의가 오랫 동안 말을 타고 다리 피부가 벗겨져 고생했다고 하니 “그것 보라, 그렇게 말렸는데 가니까 그렇게 됐다”고 얘기하는 추사의 글을 읽으면 두 사람이 연인같다는 생각이 든다. 서울에 있을 때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도 있다.  

초의선사가 40년간 머물었던 일지암

새로 딴 차는 혼자만 즐기면서 먼곳에 있는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 것입니까?인편으로 편지를 받으니 선사가 사는 산중이나 내가 사는 이곳이 전혀 다른 세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이곳은 세밑 추위가 기승을 부려 벼루물과 술을 얼리고도 남을 정도입니다.차는 갈증이 난 폐부를 적셔 주어 좋지만 얼마되지 않은 것이 한입니다. 향훈스님과 전에 차에 대해 약속했는데 왜 아직 소식이 없는지요? 차바구니를 뒤져서라도 이리로 오는 인편에 보내주면 고맙겠습니다.새로 딴 차는 돌샘과 솔바람 속에서 혼자만 즐기면서 먼곳에 있는 사람 생각은 하지 않는 것입니까?서른 대의 매를 아프게 맞아야 보내겠습니까?

이 글에서도 두 사람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진다. 추사가 이와 같은 농을 해도 달관의 경지에 도달한 초의는 항상 같은 태도로 추사를 대했다. 그런 초의에게 추사는 글로써 고마움을 전한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글씨가 간송미술관에 전하는 <명선(茗禪)>이다. ‘차를 마시며 선에 들다’는 뜻으로 오른쪽에 잔글씨로 글을 쓰게 된 내용을 적었다. 

초의가 스스로 만든 차를 보내 왔는데 몽정과 노아(중국의 유명한 차)에 덜하지 않다. 이 글씨를 써 보답하는데 ’백석신군비‘의 필의로 쓴다.

 초의는 유배생활 동안 자신에게 보낸 추사의 글을 모아 책을 냈고, 1856년 추사가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추사를 향한 제문을 짓고 일지암에 돌아와 이후 산문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그리고 초의는 80세 되던 해 목욕재계하고 서쪽을 향해 가부좌한 채 열반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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