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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으로 보게 되면 그 성품이 둘이 아닙니다”성철 스님

둘이 아닌 법문〔不二法門〕이란, 대립하는 두 존재가 본질적으로 볼 때는 둘이 아니라는 것을 설한 법문입니다. 그리고 둘이 아닌 것〔不二〕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 곧 중도입니다. 
불이법문을 설한 대표적인 경전으로는 무엇보다도 「유마경」이 손꼽힙니다. 그러므로 천태 스님도 자신이 지은 여러 저서에서 불이법문을 논할 때 특히 유마경의 ‘입불이법문품(入不二法門品)’에 나오는 문수보살과 유마거사의 불이법문을 자주 거론하였습니다. 
대열반경에 말하기를 명(明)과 무명(無明)은 그 성품이 둘이 아니니 둘 아닌 성품이 곧 중도라 하니라. 중도는 이미 양변이 공하며 이 공도 또한 공하다. 그러므로 공공공이라 이름하며 불가득공이라 이름하니 이것이 둘 아닌 법문에 들어감이다. 곧 원교는 공문(空門)에 의하여 널은 문〔普門〕이라는 뜻을 밝힌 것이다. 

‘명과 무명의 성품이 둘이 아니다’함은 무명 그대로가 실성이고 환화공신 그대로가 법신이란 말입니다. 중생이 변견 때문에 명과 무명을 둘로 보는 것이지 정견으로 보게 되면 그 성품이 둘이 아닙니다. 이것이 불이중도(不二中道)로서 하나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며,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같은 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중도는 이미 양변에 공(空)하나 이 공도 또한 공(空)하므로 비고, 비고 또 빈 것입니다. 전체가 비었다는 그 병도 다 떨어져서 중도에 들어가는데 그것은 이름도 얻을 수 없고 모양도 얻을 수 없는 불가득공입니다. 이 공은 변견의 공이 아니라 자재무애한 불가득공입니다. 이것은 일승원교가 공문(空門)에 나아가서 십법계를 두루하고도 남는 원리를 설하는 데서 불이법문을 설한 것입니다. 
그런데 중도가 양변을 완전히 여의면 또한 양변이 통합니다. 즉 유(有)가 무(無)이고 무(無)가 유(有)로서 둘이 아니며, 조(照)가 적(寂)이고 적이조(寂而照)하여 하나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입니다. 이것이 둘아닌 법문이고 일승원교입니다. 법화경의 보문품에서 관세음보살이 삼십이응신(三十二應身)을 나투어 일체 중생을 제도할 때의 넓은 문〔普門〕은 실제로 이러한 중도관에 입각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유마경 가운데에 둘이 아닌 문에 들어간다고 설하는 것은, 생사와 열반이 둘이라도 생사와 열반에 의지하지 않음을 둘이 아니라 이름하여, 또한 다시 하나도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이미 둘을 버리고 다시 하나에 머무른다면 하나는 하나 아님에 대하여 도리어 다시 둘을 이루니 어찌 둘이 아니라 이름하겠는가? 지금 둘에 머무르지 아니하므로 하나도 아니며 둘도 아니라고 말하며, 또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라고 이름한다. 있지 아니하다는 것은 가(假)를 파함이고, 없지 아니하다는 것은 공을 파함이며, 있지 아니하다는 것은 둘을 파하고, 없지 아니한다는 것은 하나를 파함이다. 만약 이러하다면 응당 중도에 있으나 이 중도도 또한 공이다. 

생사와 열반이 비록 상대적이지만 생사도 의지하지 않고 열반도 의지하지 않고 양변을 완전히 여의면 이것이 곧 중도입니다. 이 중도는 둘이 아니고 또한 하나도 아닙니다. 그 이유는 둘은 내버리고 하나를 다시 취하면, 즉 양변을 여의고 그 뒤에 중도하는 것을 두게 되면 하나에 대하여 다시 하나 아닌 것이 상대가 되어 둘을 이루니 차별의 변견에 떨어집니다. ‘둘이 아니다’하는 것은 양변을 여의어 양변 자체도 찾아볼 수 없고 중도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을 의미하므로, 그밖에 다시 중도가 서게 되면 이것은 결코 진정한 둘이 아닌 것〔不二〕이 아닙니다. 열반을 증득했다고 열반에 머무르면 열반이 아니고 성불했다고 부처에 집착하면 부처가 아닙니다. 실제로 중도를 정등각해서 양변에 머무르지 않으므로 하나도 아니며 둘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닙니다. ‘있지 아니하다는 것〔不有〕은 가(假)를 파하는 것’이란 중생들은 색을 집착하나 색이 본래 공해서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있다는 유견(有見)을 부수어 버리는 것입니다. ‘없지 아니하다는 것〔不無〕은 공(空)은 파한다는 것’이란 중생들이 색의 자성이 공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니 공에 집착하므로 없는 것이 아니라고 하여 공에 집착하는 것을 부수는 것입니다. 있지 아니하다는 것은 둘을 파하고 없지 아니하다는 것은 하나를 파함이니, 유(有)도 파하고 무(無)도 파하여 색도 파하고 공도 파하면 거기에 마땅히 중도가 있으나 그러나 그 중도도 또한 공입니다. 
늘 말하지만 양변을 완전히 여의는 동시에 중도에 집착하면 그것도 중도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실로 양변을 여의면 불가득공이라 중도라는 것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생들을 위해 억지로 할 수 없이 공이요 중도라고 이름하는 것이지 중도 자체는 실제로 공해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것이 곧 불이법문입니다. 

문수는 설하되 설하지 않음으로써 불이문(不二門)으로 삼고, 정명(淨命)은 입을 막음으로써 불이문으로 삼는다. 자세히 살피건데 저 경문에는 모두 네 문의 뜻이 있다. 조법사(肇法師)가 주석해 말하기를 모든 보살은 모두 법의 모습을 말하니 곧 유문(有門)이요 문수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니 이것은 곧 공문(空門)이다. 사익(思益)에 말하기를 일체법이 바르며 일체법이 삿되다 하니 이것도 역시 넓은 문〔普門〕의 뜻이다. 마음이 법계에 노님이 허공과 같으니 이것은 공하면서도 또한 유의 문의요, 정명(淨名)의 말없음은 공도 아니고 유(有) 아닌 문이다. 

‘설하되 설하지 않음’이란 아무리 설해도 설함이 없다는 뜻이니 문수보살은 설하되 설함이 없음으로써 불이법문을 하였습니다. 정명(淨名) 즉 유마힐은 문수보살이 무엇으로 불이법문을 삼겠느냐고 문수보살이 질문하자 아무 말도 안하고 침묵을 지키자 이에 참으로 유마거사가 불이법문을 설한다고 칭찬했는데, 이 말은 유마경에 나옵니다. ‘두구(杜口)’는 입을 막는다는 것으로 곧 말을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경문에 네 가지 문의 뜻이 있다고 했는데 알고 보면 네 가지문이 각각 다른 것이 아닙니다. 중생이 변견으로 볼 때는 네 문이 각각 다르지만 아는 사람이 볼 때는 네 문이 무애합니다. 
일체법이 바르며 일체법이 삿되다는 것도 변견에 따른 정(正)과 사(邪)가 아니라, 정과 사를 완전히 성취하게 되며, 따라서 넓은 문〔普門〕의 뜻이 성립됩니다. ‘마음이 법계에 노님이 허공과 같다’에서 허공은 형상도 없고 모양도 없고 광대불변한 것을 비유하며, ‘법계에 노닌다’는 것은 활동하는 지혜자체를 말합니다. 허공을 먼데서 볼 때는 텅 비어 있는 허공이지만 이것은 또한 무한한 활동 능력이 있으므로 공하면서도 또한 있다는 문〔亦空亦有門〕입니다.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설명하자니 공문, 유문, 역공역유문, 비공비유문이라 구분하는 것이지 실상 그 내용은 유가 즉 무고 무가 즉 유로써 서로 융통하여 하나를 들면 넷이고 넷을 들면 하나로 어떤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무명의 인연을 관하여 둘 아닌 법문에 들어가면 부사의 해탈에 머문다. 그러므로 이 경에서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감을 밝히니 곧 이것이 중도이다. 이제(二제諦)를 쌍조(雙照)하면 자연히 일체지의 바다에 들어간다. 

‘무명의 인연을 관하여 둘이 아닌 법문에 들어가면 부사의 해탈에 머문다’라는 것은 중도 정관에서 볼 때 하는 말입니다. 무명을 바로 보면 무명 이대로가 법성이고 법계이며 전체가 모두 대광명이 되어 마(魔)․불(佛)을 찾아볼 수 없고, 세간․출세간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자리가 곧 부사의 해탈경계인데 부사의 해탈경계라 하여 마치 가제가 굴에 들어앉듯이 머무를 곳이 있는 줄 알면 큰일납니다. 본래 머물 곳이 없지만 중생들의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서 편의상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머무름이 없는 머무름〔無住而住〕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마경」에서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을 밝혔는데, 이것은 곧 중도를 말합니다. 이제를 

쌍조하면 자연히 살바야해(薩婆若海) 즉 일체지(一切智)의 바다에 들어가 중도를 성취하게 됩니다.

제주불교신문  jejubulgy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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