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는 진여불성이 가득합니다
상태바
우주는 진여불성이 가득합니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07.10 13: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청화 스님

우리 젊은 불자님들이 불교운동하는 것은 굉장히 갸륵합니다. 갸륵하지만 바른 견해(正見)에 입각해야 합니다. 정견은 팔정도 가운데 가장 처음 나옵니다. 정견이 되어야 바른 사고성 정사유가 되고, 바른 말인 정어가 되며, 바른 생활인 정업이 되고, 정명이 되며, 정정진, 정념, 정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견이 바로 서지 못하면 전부가 빗나가고 맙니다. 윗 단추 하나 잘못 끼우면 그 밑의 전체가 잘못 끼워지는 것과 똑같습니다. 
정견은 무엇인가? 반야바라밀이 있어야 정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제법문四諦法問도 정견입니다. 사성제는 고집멸도이지요. 고집멸도의 멸이란 바로 불성입니다. 즉 진여불성만이 사실인 것이고, 그것만이 검은 것을 검게 보고, 흰 것은 희게 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무명심 때문에 그렇게 보지 못합니다. 
교행증敎行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교만 있고 수행이 없으면 증은 고사하고 그야말로 말법인 것입니다. 정법, 상법, 말법이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그 해석을 여러 가지로 하고 있으나, 그래도 부처님 법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정견에 바른 이해와 바른 가르침, 그리고 거기에 따르는 바른 수행과 바른 증명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법입니다. 
부처님 당시는 분명히 그렇게 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시는 곳이고, 부처님과 과거 전생에 인연이 깊은 훌륭한 도인들이 많이 나오셨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부처님같이 신통자재를 갖추고 타심통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딱 알맞은 법문을 하신다고 하면 깨달은 도인이 많이 나올 터인데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석존이 가신 뒤에는 상법 천년이라 하셨습니다. 즉 증명을 못하고 마음으로 도인이 된 사람들만 조금 있을 뿐 그저 가르침만 있고 수행만 있습니다. 
오늘날의 불교는 어떠합니까? 오늘날의 불교는 교와 수행과 증의 세 가지 가운데 수행이나 증이 별로 없지 않습니까? 행도 증도 거의 없고 교만 있습니다. 교도 제대로 모릅니다. 반야사상도 미처 모르면서 불법을 안다고 합니다. 무아의 증명은 고사하고, 무아의 도리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는 분명히 말법입니다. 말법으로는 생사를 건너지 못합니다. 불교의 마지막 구제는 생사해탈 아닙니까?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사회에 봉사하는 것도 좋습니다. 다 좋지만 불법이 불법인 점, 즉 불법이 불법인 까닭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우주의 본질을 본다는 데 있습니다. 내 생명의 본질을 알고, 모든 중생과 더불어 우리 생명의 본질을 깨닫는 것입니다. 
설사 못 살아도 하루에 한 끼만 먹어도 좋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으로 기왕 태어났으면 내 생명의 본질을 알고, 우주만유의 본바탕을 알아 모든 중생과 더불어 깨닫도록, 해탈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법입니다. 
우리가 하는 불교운동은 마땅히 정법시대로 돌이켜야 합니다. 정법시대가 안 되면 행복은 없습니다. 우리 단체의 행복도 없습니다. 바른 부모도 못 되고 바른 스승도 못 됩니다. 바른 정치인도 못 됩니다. ‘나’라는 인간이 무엇인지, 혹은 자기 본래면목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인간은 대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의미도 모릅니다. 또는 감투는 무엇이고 내 몸뚱이는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바로 알지 못하고서는 바른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선은 명명백백하게 반야바라밀을 알아야 합니다. 제법공의 도리, 오온개공의 도리, 즉 모양도 소리도 향기도 맛도 촉감도 모두가 다 공이므로 무색성향미촉법이라고 하는 도리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업장 때문입니다. 무명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못 느끼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절실하고 허심탄회하게 기도나 명상, 혹은 참선을 한다면 틀림없이 그때는 그야말로 텅텅 비어오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가 비어 옵니다. 내 몸뚱이가 오십 몇 킬로, 육십 몇 킬로라고 하지만 무게란 본래 있지 않습니다. 저 자기권에 올라가면 거의 무게가 없습니다. 따라서 위로 올라갈수록 가벼워집니다. 이 대류권 내에서만 몇 킬로라고 무게를 따지는 것이지 본래 고유한 무게란 없습니다. 이것은 물리학적 사실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도 상식 차원에서 말씀하신 유교가 있고, 만법이 사실은 다 비었다고 말씀하신 공교가 있으며, 만법이 다 비었다고 하여 진실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아닌 즉 허무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중도교가 있습니다. 
우리 중생이 잘못 보아서 허망한 것이지, 우주는 진여불성이 가득합니다. 이와 같이 우주가 진여불성뿐이라고 파악하는 가르침이 중도교입니다. 중교란 유교와 공교의 중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주라는 것은 중도라고 하는 실상 즉 진여불성만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 중도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상식적인 차원을 넘어야 합니다. 상식을 못 벗어나면 속물입니다. 불교운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상식을 못 넘으면 그것은 속화운동이 되고 맙니다. 불교를 속화시키면 안 됩니다. 응당 대중화를 시킨다 하더라도 속화해서는 안 됩니다. 꼭 반야사상을 기조로 해야 합니다. 
반야사상은 모든 철학의 기조가 됩니다. 그것은 무無철학이라고도 합니다. 어려운 말로 무의 자각적 한정이라고 합니다. 즉 모두가 원래 없던 것인데 인연 따라서 현상으로 나타나 보입니다. 이렇게 모습만 보이는 것입니다. 나, 너, 밉다, 곱다, 그런 상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상의 실상은 본래 공입니다. 즉공卽空입니다. 분석한 뒤에 아는 공이 아닙니다. 이 자체로 공인 것을 성자는 명명백백하게 봅니다. 우리 중생은 명명백백히 있다고 봅니다. 이것이 전도몽상입니다. 전도몽상이란 없는 것을 있다고 보는 즉, 거꾸로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도몽상을 타파하는 것이 반야가 아니겠습니까? 전도몽상을 타파하고 꼭 행과 증을 갖추어 정법이 되어야 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