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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산사에 있는 유물들 (3) 봉정사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사찰순례(89)
1710년에 제작된 봉정사 괘불(보물 제1642호) 가로 5.76m x 세로 7.31m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사찰 중 봉정사는 경북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천등산(天燈山) 남쪽 자락에 자리한 아담한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 16교구 본사인 고운사의 말사이다. 주변 경관과 어울리는 산사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순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봉정사 순례의 백미는 우리나라 목조 건축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는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대웅전(국보 제311호)이다. 극락전은 고려 말 홍건적의 침입으로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 와 있었을 때인 1363년에 중수된 건물이다. 중수라는 의미가 기존 건물이 낡아 크게 수리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중수되기 150년에서 200년 정도 이전에도 있었던 건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런 까닭으로 극락전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인정받고 있다. 현재의 모습은 1972년 해체 복원하며 단청을 새로 해서 그다지 오래된 건물로 보이지 않지만 자리한 위치와 크기 등 기본 구조에는 오랜 연륜이 배어있다. 봉정사에는 국보로 지정된 이들 건물 외에 화엄강당(보물 제448호)과 고금당(보물 제449호)이 보물로 지정되었고, 불화와 불상 4점도 보물이다. 건물에 대해서는 이전에 언급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봉정사 불화를 살펴보겠다.

봉정사 괘불 중앙의 석가모니불 왼쪽의 관세음보살과 가섭존자


 불화들 중에 평상시에 보기 어려운 것으로 괘불이 있다. 괘불은 수륙재 같은 특별한 재나 초파일처럼 많은 사람이 모여 야외에서 법회를 해야 할 때 불단에 거는 불화이다. 당연히 법당에 거는 불화보다 훨씬 크다. 큰 사찰에는 대웅전 등 주법당 앞에 괘불을 거는 괘불대가 마련되어 있다. 봉정사에도 대웅전으로 오르는 계단 좌우에 괘불대가 있다. 봉정사 괘불(보물 제1642호)은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인 1710년에 그려진 것으로, 여백을 제외한 그림 크기만 해도 가로 5.76m, 세로 7.31m의 큰 불화이다. 운 좋게 화창한 날 대웅전 앞에 걸린 괘불을 보게 된다면 따뜻한 붉은 색조와 부드러운 녹색이 잘 조화된 그림에서 우아하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괘불의 내용은 석가모니께서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하는 모습을 그린 영산회상도이다. 중앙에 당당하게 서있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커다랗게 표현하고, 그 주위에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등 팔대보살과 석가모니의 머리 뒤로 아난, 가섭을 위시한 십대 제자를 그렸다. 보살들은 화려한 보관을 쓰고, 연꽃 등 지물을 들고 있지만 그것들을 통해 누구인지 구분할 수 있는 분은 가운데 단에 있는 두 분뿐이다. 부처님을 기준으로 좌측 중앙에 있는 보살은 보관에 작은 부처님(화불)이 묘사되었고 손에 정병을 들고 있어서 관세음보살이고, 우측의 보살은 보관에 정병이 그려졌고 손에 경함을 들고 있어서 대세지보살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나머지 보살들은 누구인지 구별할 수 있는 특징이 없이 모두 비슷비슷한 모습이다. 이 그림처럼 부처님 주변에 팔대 보살이 표현되는 경우 확인 가능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외에 미륵보살, 문수보살, 제화갈라보살, 보현보살, 금강장보살, 제장애보살이 그려지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나머지 보살들은 이들 여섯 보살일 것으로 추정된다. 십대 제자를 묘사할 경우 석가모니와 가장 가까이에 젊은 모습으로 표현되는 이는 석가모니의 사촌이자 제자인 다문제일의 아난존자이다. 그림에서는 석가모니의 우측 맨 아래에 합장한 이다. 반대로 가장 나이 들게 표현되는 이는 석가모니 열반 후 제자들을 이끈 가섭존자이다. 석가모니의 좌측 맨 아래에 수염이 허옇게 표현된 분이다. 가섭존자 뒤에 그려진 젊은 사람은 아마도 석가모니의 아들인 밀행제일의 라훌라일 것이다. 

대웅전의 아미타삼존불과 후불탱 봉안 전경


 괘불은 크기가 크다 보니 제작비용도 적지 않게 든다. 그림 제작에 관련된 사람들의 이름과 제작 시기 등을 적은 화기에는 외부 시주자가 47명, 사내 관계자가 69명이 기록되었고, 그림 제작에는 도문(道文), 설잠(雪岑) 등 7명의 화승이 참여했다고 쓰였다. 시주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림이 비단을 바탕으로 하고 그 뒤에 종이를 배접한 것이므로 바탕 시주자가 가장 많았고, 채색에 필요한 여러 가지 색깔을 내는 물감과 금박이 워낙 비쌌기 때문에 각 물감에 여러 시주자의 이름이 기재되었다. 또한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 들어가는 제 비용을 시주한 이들도 따로 기록하였다. 

대웅전의 파손된 벽화를 가리기 위해 1713년 제작된 아미타불설법도


 봉정사의 또 다른 보물 중 하나가 대웅전 불상 뒤에 걸린 아미타후불탱화(보물 제1643호)이다. 1997년 이 아미타후불탱화를 보수하기 위해 걷어내었을 때 그 뒤에서 고려 불화의 특징이 남아있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후불벽화인 영산회상벽화(보물 제1614호)가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파손이 심한 상태여서 아마 이 아미타후불탱화가 그려진 1713년에도 비슷한 상태였을 것이다. 파손이 심한 벽화를 가리기 위해 이 탱화를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은 도익(道益), 여청(麗淸), 완심(完心) 세 명의 화승이 그렸다. 중앙 대좌에 앉아 설법인을 취한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사천왕과 십대 보살, 제석천과 범천, 석가모니불의 십대 제자, 네 명의 금강과 석가모니불과 미륵불(또는 약사불) 두 분도 아미타불의 광배 옆에 작게 그려졌다. 200년을 거치는 동안 색이 산화되어 어둡게 변했지만 전체적으로 구도와 색감이 조화로우며, 십대 보살과 사천왕이 입은 옷과 영락이 여전히 화려하고 필선 또한 부드럽고 유려해 보물로 지정될 만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절집은 대웅전인데 왜 불상을 석가모니 부처님이 아닌 아미타 부처님과 그 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모셨는지 궁금할 수 있다. 현재의 아미타삼존불 이전에는 석가모니삼존불이 봉안되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지금처럼 바뀐 게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사실 조선시대 후기 때부터 전각의 이름과 봉안된 불상이 일치하지 않는 예가 많다. 이는 전각의 용도가 바뀌었거나 사찰의 상황에 따라 불상을 모시다보니 일어난 현상이다. 깎아내리기보다 부처님을 다 똑같이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봉정사에 가면 고즈넉한 절 분위기와 절집의 아름다움을 본 뒤 불당 안을 돌아보며 20세기 초나 19세기 말에 그려진 현란한 불화와 그보다 100년, 200년쯤 전에 그려진 오래된 불화를 비교해보는 즐거움도 느껴보자.

제주불교신문  jejubulgy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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