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행수기 - 부처님의 가피 (글:강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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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수기 - 부처님의 가피 (글:강연자)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07.17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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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제주불교 중흥조 봉려관 스님 탄신 154주년 기념 - 제5회 신행수기 공모 가작

늦은 저녁 전화가 왔다.
“너, 어디니?”함께 절에 다니는 보살언니였다. 다름이 아니라,〈불교신문〉에서‘신행수기’를 공모하고 있으니 나의 글을 쓰고 응모해보란다. 전화를 끊고 한참을 생각하다가‘나에게 불교란 무엇이었나’하는 의문을 안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20대 초반에 결혼을 하면서 시어머니와 처음 절에 발을 들여 놓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불상에 절을 하였다. 결혼해서도 오래도록 아이가 없다가 뒤늦게 아들을 얻게 되었고 자연스레 친정어머니와 함께 작은 암자에 다니게 되었다. 혼자 스스로 절에 간적은 일 년에 두세 번, 새해가 되면  등을 달기위해 갔고 부처님오신날이면 남들이 가니까 당연히 따라서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냥 먹고 살만하고, 삶의 굴곡이 있기는 했지만, 큰 시련이 없었기 때문에 나의 믿음은 그다지 간절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마음이 울적하거나 힘들  때는 나도 모르게 법당을 찾아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기도를 드렸다. 40대 후반이 되었을 때 곁에 친구가 ‘불교대학을 같이 다니자’고 권유하여 함께 다니기는 했지만, 가슴에 다가오는 것은 없었고, 불교공부가 하면 할수록  모르는 게 더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졸업을 하고 뒤돌아보니, 부처님에 대한 믿음은 없었고, 남들이 하니까 그저 같이 다닌 것 같다. 그 후 살아가면서도 항상 생계수단을 우선적으로 여기다보니,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합리화시키며 대충 넘어간 것 같다.〈불교대학〉에서 팔정도에 대해 배웠으나, 그것은 이론에 불과했고 내 생활과는 별개의 가르침인양 옆으로 밀어놓게 되었다. 부모님께서도 절에 행사가 있을 때는 가셔서 부처님께 절하고, 동참비만 내고는 바쁘다는 핑계로 바로 집으로 돌아가시고 했기 때문에 나 역시 그 모습을 닮게 되었다. 아무도 나에게 절에 대한 예법을 가르쳐주거나 부처님 법의 참뜻을 전해주지 않았기에 불공드리고 동참비만 내면 된다는 생각을 했었던 거 같다.
그냥 부처님께 절하고 ‘내 자식 잘되게 해주시고, 우리가정 편안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나의 신앙생활(부처님을 믿는)의 전부였다. 그리고 누가 종교가 뭐냐고 물으면 당연하게〈불교〉라고 대답했다. 50대가 되었을 때 다니던 암자의 스님이 돌아가셨고, 마음이 허전하여 절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참을 헤매고 있을 때, 지금 제적사 보살님이 내 이야기를 들으시고 함께 신앙생활을 하자고 하여〈과오름光明寺〉에 가게 되었다. 참 이상한 것은 절을 둘러보던 중 여기서라면 불교 공부를 조금 더 잘할 수 있을 것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자신의 암시가 나의 신앙생활에 원동력이 되었다. 부처님께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고, 부처님께 드리는 기도는 역시 간절했다. 불교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초보였지만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배우는 것이 즐겁고 아주 조금씩 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부처님의 말씀이 어렵게만 느껴졌고, 하나를 배웠다고 생각하면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실망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던 중 ‘그래. 다음에 가면 부처님말씀을 하나라도 더 배우고 실천을 하자!’ 고 내 자신에게 다짐을 했다. 어느덧 환갑을 맞으며 그동안 크고 작은 수많은 일들이 지나갔지만 절에 가서 부처님의 깨달음을 배우고 기도하며, 틈만 나면 절에 가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 그동안 누군가가 ‘봉사활동을 하러가자’ 고 하면 여러 가지 핑계를 대고 거절하였다. 봉사는〈나〉아닌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인 것처럼 생각됐다. 그러다가〈光明寺봉사회〉가 구성되고〈봉사〉도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생각에 가입하게 되었다. 이제 봉사활동이 있는 날이면 절대 빠지지 않으려고 애썼고,〈봉사〉하는 일이 즐겁게 느껴졌다. 평소에 관심이 많았던‘영상편집’을 조금씩 배워서, 봉사 활동하는 장면들을 모아 봉사회밴드에 올리면 회원들이 좋아하며   ‘어쩜 이렇게 감동스럽게 편집을 하느냐’고 격려 해주시면 보람을 느끼며 마음이 흐뭇해졌다. 부처님가르침 덕분에 나의 인생을 터닝하게 된 것이다. 
아들아이가 결혼을 앞두고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며느리가 어머니와 다른 종교인데 어떻게 생각 하시느냐”고. 나는 아무 망설임 없이 누구에게나 종교의 자유가 있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며느리는 본명도 세례명을 쓰고 있었다. 아들아이가 결혼을 한지 10년이 다되어도 한 번도 절에 대하여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 석가탄신일에 며느리에게서 연락이 왔다. 절의 주소를 문자로 보내주시면, 아이들을 데리고 등을 달러 오겠다고. “부처님 감사합니다!” 나는 며느리가 너무도 기특하고,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강요하지 않아도 나로 인하여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딛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피’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살아오면서 정말 지치고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을 때마다 부처님 앞에 엎드려 기도드리면 지쳐있던 마음이 나도 모르게 힘이 생기던 것도〈부처님의 가피〉였던 것이다. 이제 ‘장애인활동지원사’ 라는 직업을 갖게 되어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 안에서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조금씩 알아가게 되었고, 비장애인들이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지를 알게 되어가는 다리 역할을 하게 된 것 같다. 그러던 중 안타까운 것은 내가 활동지원하는 장애인분은 자기도 종교가 불교이지만 사고가 난후에는 절에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분은 교통사고로 척수장애를 입었는데, 회복하고 휠체어를 타고 절에 가니 법당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다른 종교는 휠체어를 타고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도록 문턱이 없지만. 그러나 사찰의 법당은 들어가려면 계단을 올라가서 높은 문턱을 넘어야하기 때문에 혼자서는 스스로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제껏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두고 들어갔던 법당이다. 그러나 이제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니 그것은 그다지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비장애인이든 장애인이든 누구나 차별 없이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부처님 앞에 엎드려 울고 싶을 때 다가가지 못하는 그 마음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프다. 이제 우리불교도 인간사회의 구석구석에서 부처님의 가피와 사랑을 느낄 수 있는‘생활 속의 종교’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무 석가모니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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