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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에세이 - 길을 걸으며 길을 묻다
유 현

지난 6월 중순경 청소년교화연합회 제주지부 회원들과 함께 1박2일의 여정으로 영축산 통도사와 금정산 범어사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통도사는 해동 제일의 사찰답게 가람伽藍 배치가 특이하고 웅장하며 많은 불교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일주문을 들어서자마자 개울 양옆으로 난 솔밭 길 ‘舞風寒松’이 우리를 반긴다. 산문의 초입에 한적하고 호젓한 느낌을 주는 이런 길이 있어서 행선行禪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발걸음이 가벼워 마음이 발의 움직임에 쉽게 집중이 된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에 이를 때까지 마음이 평온해져 깨끗해진 마음으로 예경을 올릴 수 있었다.
금정산 범어사로 발길을 옮겼다. 우리 일행은 일주문 앞에 기다리던 사찰 문화 가이드를 만났다. 그분으로부터 국내 사찰의 일반적인 일주문은 초석 위에 둥근 목조기둥 2주를 세웠으나 범어사 일주문은 적당히 치석한 둥글고 긴 석조기둥과 짧은 목조기둥 4주를 세워 3칸으로 구성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나름대로 ‘왜, 기둥이 두 개가 아니라 네 개일까?’라는 의문을 품고 지수화풍 4대를 상징한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해 보았다. 일주문에서 천왕문을 거쳐 불이문에 이르는 길은 섬돌을 밟아야 하는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발바닥에 닿는 느낌이 거칠고 무거울 수밖에. 지수화풍의 성품 가운데 땅의 성품을 강렬하게 의식하면서 성聖과 속俗의 경계인 불이문을 들어섰다.
언뜻 유마경의 ‘불이법문不二法門’의 글귀가 생각났다. 유마가 묻는다. “보살이 불이법문에 들어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이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문수가 총평한다. “여러 보살들의 말씀이 모두 옳습니다만, 거기에는 아직도 둘이라는 찌꺼기가 남아 있습니다. 시비분별이 그치고, 말도 없으며 마음의 움직임도 없는 경지가 바로 불이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유마와 문수의 선문답을 듣고 있던 보살들은 불이법문에 들어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달았다는 데, 이게 무슨 뜻이지? 「금강경」에도 보살이 자아도 없고 생겨남도 없는 법들에서 인욕바라밀을 성취하라고 가르치고 있지 않는가.
부처님은 시작을 알 수 없는 윤회의 길고도 긴 여정을 마치고 대웅전(금당)에 좌정하고 계시지만, 나는 정처 없이 떠도는 나그네처럼 이 세상 저 세상을 오고가고 있지 아니한가.  
내 힘으로 생길 수 없고, 내 힘으로 머물 수도 없고, 다른 법들의 영향 아래 존재하고 생기고 형성될 뿐 내가 무력해서 그렇다. 내가 놓아주지 않는다 해도 육신은 이미 갈 길을 떠나고 있다. 그들의 고향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이 몸뚱이 안에 영원한 보금자리를 마련한다는 것은 정말 불가능하다. 옛 길을 간다는 것은 지겹다. 가보지 않은 참 고향으로 가야하리. 
부처님은 ‘와서 이 법을 보라.’라고 하신다. 단지 길을 가리키고 안내할 뿐이다. 이 몸뚱이 안에서 일어나는 법들을 알아차리고 행선行禪을 통해 정진력을 키우고, 그 정진력으로 고요함을 얻어서 깨달음의 지혜가 샘물처럼 솟아나야 한다.
산문으로 들어가는 통도사의 길이 선정의 길이라면, 범어사의 길은 정진의 길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 걸으면서 시선을 여러 곳에 두거나 망상의 꽃을  피운 게 아니라 길[道]을 물었기 때문이다.

제주불교신문  jejubulgy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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