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에세이 - 보살의 길[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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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에세이 - 보살의 길[道]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08.21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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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는 누구에게나 다 심리적 갈등으로 힘든 시절이다. 나 역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거칫해서 그 시절은 혼돈 그 자체였다.
  그나마 나를 위로해 준 건 푸시킨의 시 한편.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 멀지 않아 기쁨이 날이 오리니. /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 버리고 / 지나가 버린 것은 그리움이 되리니.”
  이 삶이 언제나 계속될 것처럼 정신없이 살다가 어떤 일은 아직 시작도 못하고, 또 어떤 일은 이제 겨우 시작했으며, 그나마 겨우 반 정도밖에 하지 못한 일도 있는데, 무명無明의 어둠을 헤쳐 나가는 깨침을 완성하지 못했으니 취생몽사醉生夢死의 삶이 아니던가. 
  옛 성현들이 남긴 삶의 어록들 가운데 생생하게 기억나는 사자성어는 ‘안수정등岸樹井藤’이다. 생사고해에 헤매고 있는 인간의 삶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인데, 우리네 삶이 이와 같다면 보살의 삶은 도대체 무엇인가? 
  「유마경」의 보살사상에 따르면 보살은 자신만의 해탈을 추구하지 않고 중생이 가장 고통 받는 현장으로 가서 함께 머문다. 이 세상에 어리석음이 남아 있는 한, 존재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는 한 유마의 아픔[苦]은 계속된다. 
  보살의 사랑도 꼭 이와 같아서 중생들의 아픔이 낫지 않는 한 보살의 아픔도 나을 리가 없으며 중생들의 아픔이 나을 때 보살의 아픔도 낫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식을 위해 그렇게 자상하시던 아버지나 어머니에게도 모든 중생의 이고득락離苦得樂을 바라는 보살의 거룩한 마음은 찾아보기 힘들다. 하물며 세속적 욕망에 물들어 온갖 오염된 행위로 자신마저 해롭게 하는 것이 유정 중생인데, 남을 위한 생각이야 어찌 꿈이나 꾸어 볼 수 있겠는가. 
  어떤 이가 있어 나에게 “그대는 보살계를 수지하고 있느냐?”라고 묻는다면 ‘아직도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나그네’란 글귀로 답하고 싶다. 나그네는 새 집을 짓지 않아야 멋있다. 나그네는 본디의 고향을 찾아 뜬 구름처럼 떠도는 길을 멈추어야 품수에 맞다. 
  죽음의 염라왕은 내 앞에서 노려보고 있는데 다시 되돌아가려 해도 길은 보이지 않고 앞길은 끝 간 데 없다. 고통의 짐에서 벗어나려는 마음은 있지만 번뇌와 망상의 그물에 걸려 바람처럼 자유롭지 못하다.
  취착이 대상이 되는 이 몸뚱이[五取蘊]가 고통이다. 이것들을 서게 하고, 걷게 하고, 앉게 하고, 누워서 쉬게 하고, 목욕하게 하고, 장식하고, 먹이고, 영양을 나르게 함으로써 짐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몸이라는 배에 의지하여 고난의 큰 강을 건너 저 언덕으로 가야 하나니. 어떤 것이 짐을 내려놓는 것인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이 세 가지의 불씨가 남김없이 소멸함이다.
  피안에 도달하기 위해 닦아야 하는 길은 팔정도이다. 성문, 연각, 보살은 개념에 불과하다. 중생과 함께하고 중생을 제도하고 중생을 이롭게 한다고 해서 중생의 근원적 고통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중생의 세상은 늪과 같고 신기루와 같고 포말과 같기 때문이다. 
  오히려 중생을 해체해서 중생이 없음을 알고 보는 법안法眼을 밝혀야 한다.
눈·귀·코·혀·몸·마음의 여섯 가지 문에서 법들의 일어남과 사라짐[法集卽滅法]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 때 중생의 문제는 근원적으로 해결된다는 것이 부처님의 사자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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