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칼, 부처님의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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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칼, 부처님의 칼
  • 보문 이도현 객원기자
  • 승인 2019.08.28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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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 이도현 <본지 객원기자>

일반적인 칼의 쓰임은 ‘죽임’에 있으며, 죽임의 대상에 따라 칼의 기능은 순기능과 역기능으로 나누어진다. 칼은 검(劍)과 도(刀)로 구분하는데 날이 양쪽으로 나있는 것을 ‘검’이라 하고 한쪽에만 날이 있는 것을 ‘도’라 한다. 무술을 수련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백일도, 천일창, 만일검이라 하여 도를 배우는 데는 100일이요 창을 수련하는 데는 천일, 검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경지에는 만일, 즉 10년을 수련해야 한다는 말이다. 불교에서도 번뇌를 끊어 없애는 지혜를 칼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살인도 활인검(殺人刀 活人劍)이 그것이다. 주로 선불교에서 선어(禪語)로 쓰이는 말이며, 큰 법력을 지닌 스승이 제자의 선수행을 지도할 때 살리고 죽이는 것을 자유자재로 하는 기능을 칼에 비유한 말이다.
사람을 죽인다(殺人)는 것은 생멸심과 분별심에 빠져있는 수행자들의 번뇌망상을 끊어준다는 것으로서 사량분별하는 중생심을 죽이는 반야지혜의 칼을 비유한 말이라 하겠다. 사람을 살린다(活人)는 것은 전도망상에서 깨어나 본래면목을 자각하게 해준다는 뜻으로 허망함을 지혜로움으로 바꾸며, 본래 청정한 불심의 지혜를 회복하여 보살도의 삶을 살도록 해주는 방편의 칼을 비유한 말이다. 선수행에서 살인도는 나의 아상을 잘라 죽이는 칼이고 활인검은 아상의 죽음 위에서 마침내는 새로운 나로 살라는 칼인 바, 마음이 칼을 닮아가는 과정으로 비유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 다른 부처님의 칼로는 취모검(吹毛劍)이 있다. 칼 날 위에 털을 올려놓고 후~ 불기만 해도 그 털이 잘라져 버리는 예리한 명검으로 반야의 칼이라고도 한다. 깨달음의 지혜, 부처님의 지혜를 뜻하는 말이며, 마(魔)로 비유되는 번뇌를 제거하는 칼이다. 여기서 마는 수행자의 선근을 파괴하고 마음에 틈이 생기게 하여 마음을 흐트러지게 하며 수행을 방해하고 결국에는 수행자를 무너뜨려 생사를 윤회하도록 하는 것을 일로 삼는 심리작용을 말한다. 도를 이루는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마(魔)인 욕망, 성냄, 혼침망상, 불안초조, 자신에 대한 불확신 등을 제거하는 칼이 바로 취모검이다.  생사의 경계를 허물고 어둠과 밝음의 경계를 부수어 정심(淨心), 즉 삼독을 여읜 마음, 텅 빈 마음, 무주무상무념의 마음, 공의 마음을 만드는 도구가 곧 취모검이다. 
다음은 예수님이 마태복음에서 하신 말씀이다. “나는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예수님의 본뜻을 이해하지 못하면 크고 많은 오해를 일으키게 하는 말씀이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많은 기독교 성직자들이 예수님이 주신 칼을 악용하고 남용하여 일으킨 살육과 파괴의 현장을 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십자군전쟁과 종교전쟁이 있다.
11세기말에서 시작하여 13세기 말까지 400년간 벌어진 기독교와 이슬람간의 십자군전쟁은 종교적 열정과 세속적 욕망의 잘못된 만남에서 오는 비극적인 살육의 지옥세상을 만들었고, 1618~1648년간 유럽에서 벌어진 가톨릭과 개신교간의 30년 종교전쟁은 역사상 최대이자 최후의 전쟁이라고 불릴 정도로 치열하고 잔인한 전쟁이었다. 기독교가 2,000여 년에 걸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뜻이다”는 명목으로 죽인 사람의 숫자가 2억을 넘으며, 죽임을 당한 기독교인까지 합하면 헤아리기 힘들 정도이다. 그러나 결코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죽이라고 칼을 주시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보여주는 일관된 메시지는 “사랑과 용서”이다. 사랑과 용서의 실천을 통하여 해방과 자유, 평화와 평등, 정의와 구원으로 사람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인간화가 실현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세우고자 했던 분이다. 사랑의 예수님이며 구원의 예수님이 당신의 뜻에 거스른다는 이유로 사람을 제거하라고 칼을 주실 수는 없지 않은가. 선이 악을 제거하기 위해 칼을 드는 순간 이미 그 선은 악에 물들어버린 것이 된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이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八福)중의 하나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일체의 알음알이와 탐욕으로 가득 찬 마음, 아만심, 아상을 털어버린 사람이다. 나를 죽임으로서 “나는 내가 아니므로 비로소 내가 된다”는 새로운 나로 태어나게 하는 칼이 바로 예수님이 주신 칼이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지고지순의 진리로 여기는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베어내라고 주신 것이 예수님의 칼이다. 
증오의 광기는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강력한 원동력이다. 사회를 병들게 하고 세상을 악으로 물들게 하는 원초적인 힘이다. 증오심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예수님의 칼은 전쟁과 증오의 광기를 평화와 번영의 길로 바꾸는데 써야 할 도구이다. 예수님이 살았던 시대는 로마제국의 식민통치 아래에 있는 세상이었다. 세계패권주의를 표방한 로마제국의 통치수단은 칼이었다. 칼의 힘으로 평화를 이루고자 했던 로마의 평화 시대였다. 흔히 평화를 ‘전쟁이 없는 상태’ 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우고자 했던 평화는 전쟁이 없는 칼의 평화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된 상태, 즉 자유와 평등,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통치원리가 지배되는 공동체 속에서 구현된 진정한 평화를 예수님은 이루고자 했던 것이다. 
부처님과 예수님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내 마음을 죽이고 비우는 것이다. 내가 죽어야 마음이 텅 비고, 비워진 그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 해탈의 나를 채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처님의 비운 마음과 예수님의 가난한 마음은 둘이 아니며 그 마음을 이루자 하는 예수님의 칼과 부처님의 칼 역시 다를 수가 없다. 
교회를 권력화 하며 정치권으로 진입하고자 하는 일부 개신교 목사들의 무치한 행태에 들이대야 할 것이 바로 예수님의 칼이며, 무명초 한 가닥 베지 못하는 녹슨 취모검도 칼집으로 보내어 시절인연을 기다려야 하는 시대이다.
已乎已乎(이호이호)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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