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젖빛 바람 / 고 영 기 (1935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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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젖빛 바람 / 고 영 기 (1935 ~2006)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09.25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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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호 시인의 마음을 젖게 하는 한 편의 詩

억새꽃들이 하얗게 하얗게 밀려난다.
바람에 얽히고 쫓기고 묻히면서 흔들린다.
말들은 없고 말젖빛 바람이 불어온다.
산을 버리고 바다를 버리고 말들은
땅속 깊이 누워 있다. 아득한 벼랑 끝
빛나는 정강이뼈 불붙는 갈기털로
은백색 하늘 한 자락이 흔들린다.
<중략>
말들은 없고 말젖빛 바람이 불러온다.
억새꽃들이 하얗게 하얗게 밀리면서
허물어진 바다로 투신한다. 자취도 없이
밤새 먼 파도소리가 목울대까지 올라오고
벼랑의 말들이 젖은 눈을 껌뻑거리며 소리친다.

 


고영기 시인은 제주시 한림읍 출신이다. 제주에서 오랫동안 언론인 삶을 살았다. 1988년 「시문학」으로 늦은 나이에 등단했다. 한국예총제주지부장,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제주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했다. 위 시의 화자는 말의 젖빛과 억새꽃빛이 유사함에 시상을 얻었나 보다. 제주의 들판에 방목된 말의 자유분방함과 바람, 산과 바다 이런 원초적 생명적 이미지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면서 시의 리듬을 살리고 있다. 그리고 제주 늦가을 들판의 특징들을 제주만이 갖는 짙은 향토색을 담아내어 노래하고 있다. 그것은 제주 사람들의 지난한 삶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라산자락 하얀 억새꽃이 말 젖빛 바람에 파도처럼 물결치는 넓은 들판에서 한 마리 길 잃은 말을 보는 황량한 풍경이 그려진다. 지나친 개발에 대한 경고를 보내고 있기도 하다. 

/글.시조시인 오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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