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행법이 따로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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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행법이 따로 있을까?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10.10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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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일대사를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역자는 8정도의 실현으로 보고싶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고구정녕히 말씀하신 팔정도를 우리가 찰라찰라에 실현하려고 노력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참다운 불자요, 바로 성자의 길, 해탈 열반의 도정으로 들어선 자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불자로서 바르게 신행을 하려는 자가 당연히 고뇌하고 간구 할 수밖에 없는 저 팔정도를 사유하고 실현하려는 노력보다는 테크닉으로 도를 구하려고 하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간화선이야 말로 진짜 수행법이다”라고 하여 장판때가 잔뜩 묻어 거들먹거리거나, 아니면 “아니다 간화선은 후대에 발전된 수행법이고 위빠사나야말로 부처님께서 직접 설한 수행법이다.”라고 하여 남방에서 후대에 발전된 수행기법을 부처님이 직접 설하신 것으로 오해하여 역시 팔정도를 잃어버리고 있다.
이처럼 도를 테크닉에만 치중하여 접근하게 되면 우리가 불교 역사에서 보는 모든 비불교적인 양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게 역자의 소견이다.팔정도는 쉽다면 가장 쉽고 어렵다면 가장 어려운 것일 것이다. 팔정도는 매 찰나찰나에 삶과 직면하는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진지한 삶, 성숙된 삶, 치열한 삶을 구현하는 게 팔정도일 것이다.
대승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보살행을 팔정도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보살행이라는 산냐를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최고의 보살행이라면 보살행이라 할 수 있다. 마치 중국선종이 최상승이라는 이름으로 대승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했고 그 최상승이란 내용을 보면 보살행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몇몇 남방 학자들은 중국선종은 대승불교속의 테라바다(Theravada, 상좌부)라고 하는 것을 읽은 적이 있다.
팔정도의 출발은 정견(正見, samm -di hi, 바른 견해)이다. 나는 다행히 처음 출가해서 얼마 안되어 근본불교라는 이름조차도 모르시는 선방의 한 노스님으로부터 ‘정견이면 성불’이라는 말씀을 듣고 마음에 깊이 새긴 적이 있다. 정견을 가지려 노력하고 끝없이 고뇌하고 사유하고 어떠한 고정 관념, 경계에도 속지 않으려고 애를 쓸 때 팔정도의 법바퀴는 드디어 육중하게 구르기 시작한다 하겠다.
그건 어느 수행법(테크닉)이 좋으냐 나쁘냐, 옳냐 그르냐의 문제가 아니라 생각한다. 테크닉은 시대와 환경의 산물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거듭 거듭 바뀌어 오는 것이다. 남방의 위빠사나 기법이 그렇고 북방의 간화선이 그러하다. 요즘 위빠사나를 부처님이 직접 설하신 것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 출처로 거론하는 위방가(Vibha ga)는 남방의 아비담마 논서의 두 번째이고, 청정도론(Visuddhimagga)은 남방불교의 부동의 준거로 붓다고사 스님의 대작이다.
그래서 이들은 남방 아비담마 불교의 이론이지 근본불교의 가르침과는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위빠사나 기법은 청정도론에서 40가지 명상주제(kamma h na, 깜맛타나)로 정리되어서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는데 지금 남방에서 통용되고 있는 위빠사나 기법들은 이 40가지 수행법과는 그러나 또 다르다.
그 후에 긴 세월을 통해서 자꾸 개발되어서 체계화하고 정리해온 수행법인 것이다. 간화선만 해도 그렇다. 선종의 초기에는 화두란 기법이 없었으며 세월이 가면서 여러 스님들이 제창하여 온 것을 대혜스님이 체계화한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중국 청조에는 다시 염불선으로 정착이 되고 지금 시대의 중국선은 염불선이 기본이라 하겠다. 이런 자체가 이미 기법은 시대에 따라 환경에 따라 변해오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거듭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은 이제 우리는 이런 위빠사나 수행법이 옳냐 간화선이 옳냐는 것에서 자유로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기법들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정통성이 있느냐는 무의미하고 어찌 보면 유치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러한 고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며 실제로 지금의 역자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물론 이리 되기까지는 많은 고뇌와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어찌 알겠는가. 역자의 관점이 또 바뀔지. 역자의 관심은 이런 기법의 배후에 항상 흐르고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 바로 저 팔정도이다. 기법이라는 관점에서 풀려날 때 그때 저 팔정도는 구르기 시작하는 게 아닌지 생각해본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팔정도에서는 대승불교에서 강조하는 보살행이 없다. 사회에 대한 성급한 열정이 오히려 팔정도를 가로막는 장애가 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사람이 위빠사나에서 향상의 길을 찾았다면 그 길을 묵묵히 가면서 팔정도를 구현하면 되겠고 간화선에서 향상의 길을 발견한 사람은 또 그 길을 열심히 가면 될 것이다.
그러다가 이게 아니지 않은가 하고 깊은 고뇌를 하게 되고 결단이 되면 우리 세존께서 6년의 엄청난 난행고행을 포기하고 동시대 고행자들의 비난을 뒤로하고 분연히 일어서셔서 유일한 길(eka-y na)이라 표현되는 마음챙김(sati, 正念)을 발견하고 실현하셨듯이 그런 태도, 그런 불굴의 용기를 가지고 팔정도를 행하려 노력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팔정도를 진지하게 가는 사람은 항상 성급한 열정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처음부터 부처님 가르침은 대기(對機)설법이었고 그래서 다양한 방법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으며 그게 또 역사적으로 불교가 걸어온 길이기도 하다. 그런데 방편에만 빠져서 근본을 잃어버리면 또 온갖 사이비들이 정법이라는 기치를 들고 한소식이라는 창을 들고 무리를 지어서 온갖 난리를 부려댄 것이 또 피할 수 없는 불교역사이었고 지금도 그런 무리들이 횡행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럴수록 정견(正見)이 얼마나 중요하고 우리가 사무치도록 가슴에 담아야 하고 찾아야 하고 사유해야 하고 실행해야 하는 것인가를 절감한다. 그러기 위해서 근본부처님의 가르침을 나름대로 열심히 찾고 고뇌하고 사유하고 내 삶에 매순간 적용하려는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될 것이다.

-도서출판 불광. 각묵스님의 금강경 역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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