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스님의“선가귀감 강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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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호 스님의“선가귀감 강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10.16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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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을 위한 독서록 /글 木筆
선가귀감 휴정이 이 책을 저술하게 된 동기는, 당시의 승려들의 타락된 풍조를 시정하여 승단의 가풍을 바로잡으려는 목적, 불교전적이 너무나 방대하여 갈피를 잡기 어려우므로 핵심 사상을 뽑아서 후학들이 쉽게 불교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목적, 불교 입문자를 위한 지침 등으로 이 책을 지었다고 한다.

오래전 선가귀감을 공부하느라 무척 애를 썼던 기억이 있다. 매주 저녁 암자에 올라 몇몇 도반들과 함께 스님의 강의를 들었다. 왠지 어렵게 느껴졌고, 진도도 더디게 나갔다. 월호 스님은 이러한 선입견을 단번에 제거해 주었다.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부처님의 말씀이 참 재미있다는 생각을 하였고, 단숨에 반절 이상을 읽어나갔다. 
나는 그동안 내 자신이 열심히 수행하여 ‘부처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본래 면목은 ‘마하바라밀’이므로 이것이 진짜 ‘나’임을 명백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명상”을 통하여 명백히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보아 상상 이상으로 상태가 좋아질 때 가능하다고 한다. 
공부는 거문고 줄을 고르듯하여 팽팽하고 알맞아야 하니, 너무 애쓰면 병나기 쉽고 잊어버리면 무명에 떨어지게 된다. 성성하고 역력하게 하면서도 미세하게 끊임없이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공부를 하다보면 마군이 들어오는데, 이때는 삼귀의를 하는 것만으로도 마왕의 해침을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누군가 선물을 줘도 안 받으면 내 것이 아니듯, 마군이 마음을 따라 들고 일어난다 하더라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상관이 없는 것이다. 공부가 한 조각을 이룬다면 금생에 완전히 꿰뚫지는 못하더라도 마지막 눈감을 때 악업에 끌리지는 않는다고 했다. 
업(業)이란 어두운 무명이고, 참선은 밝은 지혜이다. 마음공부의 체험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죽기 직전이나 죽고 나서도 큰 힘이 된다고 한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예로 참선 수행을 설명하고 있다. 만약, 여섯 개의 구멍이 있는 곳에 도마뱀이 들어갔을 경우, 도마뱀을 잡으려면 구멍 다섯 개는 막고 한 구멍만 남겨둔 채 그 구멍을 잘 관찰해야 한다. 이처럼 참선 수행은 여섯 감각기관, 즉 눈, 귀, 코, 혀, 몸, 마음 가운데 다섯 곳을 막아 버리고 오직 마음의 문 하나만을 열어 놓고 거기에 관찰력을 집중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번뇌에는 보기만 해도 끊어지는 견소단(見所斷)과 끊임없이 닦아야만 끊어지는 수소단(修所斷)이 있다. 성품이야 단박에 공함을 보면 되겠지만, 몸과 마음은 분별이 오락가락하므로 꾸준히 닦아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문득 ‘본마음’, ‘참나’가 부처와 조금도 다름이 없음을 깨치는 것이 “단박깨침”이요, 깨친 뒤에 익힌 버릇을 끊어 가면서 범부가 성인에 이르기까지 수행하는 것이 “점차로 닦는 것”이다. 그러나 몸과 마음을 수련해서 성품을 매진하는데 정진해야지, 몸과 마음을 강화하는데 그친다면 아상을 증장시킬 뿐이다. 아무리 수련을 거듭해도 늙고 죽기는 마찬가지이므로 몸과 마음에 초점을 맞춘 수행의 끝은 허망할 뿐이다.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성품에 맞춘 수행을 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수행의 요지는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을 다스리는데 있는 것이다. 최상의 깨달음-아뇩다라삼먁삼보리 또한 고정된 실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삼독이 쉰 자리가 곧, 부처의 자리인 것이다. 성품은 디지털식으로 단박에 보아야하며, 몸과 마음은 아날로그식으로 꾸준히 닦아 주어야 한다. 어린아이가 엄마생각을 하는 것은 진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또 사막에서는 시원한 물밖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화두참구도 이처럼 간절해야 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사람의 목숨은 한 호흡 간에 달려있다고 하셨다. 아이가 엄마의 젖을 찾는 것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함인 것이다. 
‘진공묘유(眞空妙有)’ 사람마다 본성(근본자리, 진리의 세계)이 있고, 형상(현실)이 있다. 내게 주어진 상황- 이 몸뚱이, 내 주변사람들에 대해서 지나친 애착을 가져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무시해서도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성품에만 치우치는 것도 아니고, 형상에만 치우치는 삶이 아닌 중도적 삶이 훌륭하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중생을 건지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중생의 생사와 열반이라는 잘못된 견해에서 건지기 위해서이다. ‘중생을 부처로 만들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이다.’(사익경思益經) ‘중생, 중생’하지만, 사실 이 중생을 떠나서 부처도 없고 생사를 떠나서 열반도 없다. 왜냐? 모든 것이 허공 꽃과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금강경” 제3 대승정종분에 “여시멸도 무량무수무변 중생하되 실무중생이 득멸도자니라. 약보살이 유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면 즉비보살이니라”고 한다. 보살은 무슨 일을 하든 중생을 위해서 한다. 중생은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을 위해서 한다. 이것이 바로 보살과 중생의 차이이다. 
중생은 “법륜을 굴리겠습니다.”하고 서원을 세워 열심히 살다보면 어느덧 중생을 위해서 법륜을 굴리는 보살이 되어간다. 서원이 없는 인생은 업생이요, 서원이 굳건한 인생은 원생이 되는 것이다. 생사에서 벗어나려면 탐욕과 애욕의 사슬을 끊어야 한다. 윤회는 과거지향적이 아니라, 현재의 행위로 새 앞날을 창조할 수 있다고 하는 미래 지향적인 것이다. 나의 삶은 내 작품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내가 고쳐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치는 단박에 깨치지만, 분별심은 금방 없어지는 게 아니다. 아라한과를 얻고도 과거의 습관이 없어지지 않아 힘들어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햇살 쏘이는 문틈에 가느다란
티끌 고물거리고
맑고 고요한 물에 온갖 그림자가
또렷이 보인다.
 
마음이 고요하고 밝으면, 세간의 생멸상을 잘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읽을수록 빠져드는 느낌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초반에 나오는 문구에 대한 받이 맨 끝부분에 가서 마무리 된다는 것이다. 하루 빨리 내가 부처임을 깨닫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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