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창제는 불교적 세계관의 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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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창제는 불교적 세계관의 산물?”
  • 안종국 기자
  • 승인 2019.10.16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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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어지는 108자이고 월인석보도 108쪽이다. 불교의 대표적인 신성수‘108’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훈민정음 창제 당사자들의 의도적인 조절로 보인다.‘더불어’등을 고의적으로 누락하는 방식으로 적어도 4글자 이상이 탈락됐다. 또 한문 어지에서도 흔히 사용하는‘而己矣’를 사용하지 않고‘耳’를 사용하고 있는 등, 글자의 수를 맞추려는 의도적인 노력이 담겨 있다. 또 현재 국보 70호로 지정된『훈민정음』의 경우에도 불교적 우주관인 3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찰에서 아침 저녁으로 종을 칠 때 그 횟수는 28번과 33번이다. 하늘의 28수(宿)와 불교의 우주관인 33천(天)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집현전 학자들은 한글창제를 알지 못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은 훈민정음 창제에 신숙주, 성상문 등의 집현전 학자들이 주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1990년대 후반 이후 집현전 학자들의 한글창제 주도론을 의심하다가 지난 2019년 7월에 개봉한 영화 ‘나랏말싸미’에서는 신미대사가 한글을 만든 장본인으로 소개되고 있다. 
실지로 한글 창제 이후 가장 크게 반발한 것은 집현전 학자들이다. 당시 집현전 부제학이던 최만리를 비롯해 신석조, 김문, 정창손 등은 “굳이 언문을 만들어야 한다 하더라도 마땅히 재상에서 신하들까지 널리 상의한 후 후행해야 할 것인데 갑자기 널리 펴려 하니 그 옳음을 알지 못하겠다”고 상소를 올린 것을 보면 집현전 학자들은 한글 창제 작업에서 소외되어 있던 사실이 드러난다. 이렇게 1443년 12월 세종대왕이 한글창제를 선언할 때까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고, 성삼문은 한글이 창제될 무렵이 되어서야 집현전에 들어왔다. 신숙주는 창제 2년 전에 들어왔지만 그 이듬해 일본으로 갔기 때문에 창제에 참여할 시간도 없었다. 결국 유학자들의 한글창제설은 근거가 희박하다. 

영화‘나랏말싸미’의 신미대사
영화의 핵심인물인 신미 스님(1403-1480)은 역적의 아들이라고 자신을 세종에게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는 다르다. 신미 스님은 태종때 영의정을 지낸 김훈의 장남으로 1403년에 탄생했고, 조부는 승록대부라는 고위직을 지냈다. 어머니는 예문관 대제학 이행의 딸이었다. 스님의 출가 전 본명은 김수성(金守省)이며, 일찍이 성균관에 들어가 촉망받던 인재였다. 하지만 옥구진병마사로 있던 아버지 김훈이 조모상을 치르지 않고 임지를 떠났다는 이유로 집현전 학사였던 박팽년 등으로부터 불충불효의 죄목으로 탄핵을 받고 유배생활을 했는데, 이를 두고 역적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무예에도 뛰어났던 부친은 이종무를 따라 대마도를 정벌하여 공을 세웠지만 죄인의 몸으로 출정했다고 하여 재산을 몰수당했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본 김수성은 20살 무렵 양주 회암사에 주석하고 있던 함허당 스님에게 출가를 한다. 이후 도반인 수미(守眉)스님과 20여년간 대장경을 탐독하였으며, 인도어인 산스크리트어와 티벳어를 습득했다. 스님의 동생인 김수온(1409-1481)은 조선전기 대표적인 호불성리학자였고, 역시 집현전 학사였다. 그는 시와 서에 능했고 중국에까지 이름을 날린 문장가로, 한성부윤과 공조판서를 지냈다. 
영화에서는 세종대왕과 신미대사의 첫 만남을 소헌왕후 심씨가 어떤 스님에게 부탁했고, 그 결과로 신미 스님이 궁에 들어가 세종을 돕는 것으로 설정이 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은 신미 스님을 세종에게 추천한 인물은 효령대군이다. 효령이 대장경과 언어에 능한 승려가 속리산 복천사에 있다고 알려주었고, 세종은 둘째아들 수양대군을 보내 신미스님을 모셔오게 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신미대사의 이름이 최초로 거론되는 시기가 언문 28자를 발표한 세종25년(1443)보다 뒤인 세종28년(1446)이지만, 신미대사의 동생 김수온이 집현전 학사로 재직중이었고, 그의 집안이 태종때부터 명문가문인 점을 보면 납득하기 어렵다. 
 
한글 창제후 왜 불교서적을 주로 간행했을까
세종이 1443년 12월에 언문28자를 직접 지었음을 발표하고 이듬해 시험적으로 한문발음 사전인 ‘운회’의 언해를 지시하자, 집현전 부제학으로 있던 최만리 등은 상소를 올려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라며 새로운 문자 창제를 비판한다. 그래서 세종은 집현전 학사 가운데 젊은 소장파 학자 소수만을 한글창제에 포함한다.
세종은 1446년 훈민정음을 정식으로 반포한 뒤에 곧바로 수양대군과 신미대사에게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대기를 엮을 것을 명했고, 신미대사는 수양대군을 도와 불과 1년도 되지 않는 시간에 24권에 이르는 ‘석보상절’의 한문본과 언해본을 모두 완성했다. 세종 또한 ‘석보상절’을 읽고 감탄해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며 노래한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 등을 살펴보면 이미 신미대사가 훈민정음 반포 이전부터 세종의 한글창제를 알고 있었으며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었음을 신뢰할 충분한 근거가 된다. 
학계에서 신미대사가 한글창제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이유로는 세종28년(1446)에 세종이 신미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다는 세종실록의 기사를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런데 실록에는 신미대사를 간승(姦僧)으로 종종 묘사하고 있고, 세종실록 ‘정음창제기사’에 유독 오자나 탈자 및 오류처럼 보이는 괴이한 글자들이 많아, 이는 단순 실수가 아니라 임금을 비하하고 모욕하고자 하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즉 성리학을 이념으로 조선을 건국한 신진사대부의 억불숭유의식이 작용된 이유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세종은 승하하기 전, 신미대사에게 ‘선교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禪敎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라는 법호를 내릴 것을 문종에게 유언으로 남기지만, 당시 유학자들의 상소와 거센 반발로 결국 ‘우국이세’와 ‘존자’라는 호칭을 빼고 ‘혜각종사’라고 강등된 법호를 내린다. 

영화 <나라말싸미>에서 한글창제의 주역으로 묘사된 신미 스님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1461년 ‘간경도감’은 불경의 인쇄와 언해사업을 시작한다. 이때 신미스님을 비롯하여 수미, 학열, 해초, 학조스님 등 당시 선지식으로 추앙받던 고승들도 불전언해사업에 동원되었다. 간경에 종사한 사람만 170명이 넘었으며, 개성, 안동, 상주, 진주, 전주, 남원 등에 분사(分司)를 두었다고 한다. 설치 1년만인 1462년에 ‘능엄경언해’를 한글로 번역하는데 성공하였고, ‘법화경언해’(1463년), ‘금강경’, ‘반야심경’, ‘아미타경’, ‘영가집’(1464년), ‘원각경’(1465년), ‘수심결’, ‘몽산법어약록’(1467년)을 번역하였으며, 세조가 승하하고 1471년 12월 5일 성종이 간경도감을 폐지하기까지 한문본 37종 500여권, 국역본 10종 36권이 출간되었다. 특히 세조가 지었다는 ‘상원사중창권선문’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글을 담고 있으며 국보 제292호로 지정되었다.
이와 같이 훈민정음 반포 후에 유교경전이 아닌 불교경전의 편찬이 주를 이룬 것은 불교계와 스님들의 노력이 훈민정음의 보급과 정착에 큰 기여를 했다는 역사적 사실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여러 정황으로 보면 세종과 세조대에 이어진 신미대사를 비롯한 많은 스님들의 기여가 없었다면 한문을 숭상하고 대국에 사대하던 유학자들은 어쩌면 한글을 역사에서 삭제해 버렸을 가능성이 높은 일이다. 

신미대사와 불교계 한글창제설의 근거
신미대사의 한글창제설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국어학자들은 ‘세종실록 계해년 그믐조’에 나타나는 ‘是月上親製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이달에 임금이 몸소 언문(諺文)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는 古篆을 모방하였다)’ 는 문장을 근거로 제시한다. 즉 ‘倣古篆’은 ‘古 篆字를 모방했다’는 뜻으로, 정인지가 지은 ‘훈민정음 해례’에도 ‘象形而倣古篆ㆍ‘古 篆字를 모방해 글자상형을 삼았다’는 문장이 나온다. 조선초기 유학자인 성현(1439~1504)도 그의 저서 ‘용재총화’에서 ‘基字體依梵字爲之(그 글 자체는 범자에 의해 만들어졌다)’라고 밝히고 있다. ‘용재총화’는 훈민정음 반포 30년 후에 쓰여진 책이다. 이수광도 그의 저서 지봉유설에서 ‘우리나라 언서(諺書)는 글자 모양이 전적으로 범자를 본떴다’(我國諺書字樣全倣梵字)라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상당수 학자들은 앞서 언급된 ‘篆字’를 ‘梵字’의 한자식 표현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규명작업을 벌이고 있는 복천암 선원장 월성 스님이 제시하는 증거는 다음과 같다. ▶신미대사가 범어에 능통했던 점 ▶유학 성향이 강했던 세종이 이례적으로 복천암에 불상을 조성해 주고 시주를 한 점 ▶세종이 ‘선교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禪敎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라는 긴 법호를 내린 점 ▶수양대군 세조가 복천암을 손수 찾았던 점 ▶유학자들이 당시는 물론 세종이 죽자마자 부녀자 글, 통시 글 등의 말로 훈민정음을 비난하고 험담한 점 ▶신미대사의 본관인 영산김씨 족보에 신미대사가 집현전 학사로 언급된 점 ▶한글 창제 후 실험적으로 지은 곡과 문장이 유교가 아닌 불교 내용을 담고 있는 점 등이다. 
월성스님은 특히 “조선은 유교국가라 한글창제 실험용 책도 당연히 유교적인 것으로 주로 했어야 했다.”며 “그러나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은 불교적인 내용을 담은 곡과 문장으로, 이것 역시 신미대사가 한글창제를 주도했다는 증거”라고 밝혔다. 그런데 한글창제에 신미대사 이름이 빠지게 된 것은 “세종 사후 유생들이 신미대사와 불교에 관련된 문구를 모조리 삭제했다”며 “다만 영산김씨 족보에 ‘守省以集賢院學士得寵於世宗’의 문구가 나온다.”고 밝혔다. 직역하면 ‘守省(신미대사 속명)은 집현원 학사를 지냈고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라는 기록이다.
한편 고려~조선 초기 승려들이 불경 한자를 쉽게 읽기 위해 각필을 사용했고, 그 각필은 범자(梵字)를 인용한 것으로 한글창제와 연관성이 높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말도 범어의 음가인 실담과 매우 유사하다. 즉 훈민정음 창제에는 범어에 능통한 사람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물론 여전히 한글의 기원과 관련하여 많은 의문은 풀리지 않고 있다. 불교기원설도 아직은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 신미 스님과 한글창제는 깊은 관계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에서 저평가되고, 심지어 후세에 남긴 법어나 시, 글 한편 없이 너무나 적막한 생애를 보이는 비운의 고승 혜각존자 신미대사에 대해 그의 본래 면목을 복원하는 것이 우리 불교계의 과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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