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파불교를 향한 비판 논리-나가르주나(龍樹)의 中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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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파불교를 향한 비판 논리-나가르주나(龍樹)의 中論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10.16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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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인문학

고착화된 사고의 틀을 깨는 귀류논증으로 논리에서 해방
空觀으로 연기설 재해석해 아비담마와 인도철학 전반 비판

용수(Nagarjuna) 인도의 승려. 중관학파의 창시자로 추앙된다. 중관학파의 공(空 śūnyatā)에 대한 설명은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후세의 몇몇 불교학파가 그에게 연원을 두고 있어, 중국에서는 그를 소위 ‘8종(宗)의 조사’로 존경했다. 그의 산스크리트 저서 ‘중론송(Mūlamadhyamakakārikā)’.‘회쟁론(Vigrahavyāvartanῑ)’은 존재의 근원, 지식의 수단, 진리의 본질에 관해 분석했다. 용수에 관한 최초의 전기는 유명한 번역가인 구마라집(鳩摩羅什)이 405년경에 한문으로 쓴 것이 남아 있다. 그는 인도 남부에서 힌두 승려계급인 브라만으로 태어났다고 하며, 소년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역사적인 사실과 서로 어긋나는 부분도 있지만, 그가 뛰어나게 총명했고, 대승불교의 교리를 배우고 나서 정신세계에 큰 변화를 겪었다고 전한다. 구마라집의 기록에 따르면, 용수가 근본 불교를 배우고 나서도 완전한 만족을 얻지 못하자, 마하나가 보살[大龍菩薩:’나가’는 뱀이라는 뜻으로 인도 남부 구릉지대에 사는 부족의 이름임]이 그를 불쌍히 여겨 그에게 대승불교의 가장 심오한 게송을 들려주었다고 한다. 용수는 순식간에 그것을 터득하여, 인도에 그 진리(dharma)를 전파했으며, 현학적·철학적인 이론들을 논파했다.

독서란 삼매경에 빠져들 때 세상사에 대한 적멸(寂滅)의 희열이 가장 큰 즐거움이다. 나가르주나(龍樹)의 <중론(中論)>은 그러한 내면의 적멸에 좋은 계찰(啓察)서가 된다.  
중론은 현존하는 책이 청목(靑目)의 주석을 구마라습(鳩摩羅什)이 가필하여 409년에 번역한 것으로, 용수의 초기 작품으로 27장 449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내용은 <반야경(般若經)>에 기초한 대승 공관(空觀)의 입장에서 원시불교 이래의 연기설(緣起說)에 독자적인 해석을 가해, 부파불교뿐만 아니라 인도철학사상 일반도 비판하는 것이다. 그 중심사상은 연기(緣起)→무자성(無自性)→공(空)으로 귀결되고, 또한 연기론도 모두 공성이라 설하고 있는데, 그 공성은 상대적인 가설이며 그것이 곧 중도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한마디로 공관은 유·무를 초월한 중도이며, 그것이 불교의 근본적 입장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용수의 생각을 나타내는 것으로, 용수의 이러한 이론은 대승불교에 이론적 기초를 부여한 것이다. 인도에서는 이 책에 의해 중관학파가 일어났으며, 유가행파와 더불어 인도 대승불교의 2대 사조를 형성하였고, 이후 중관학파와 유가행파가 혼합된 것이 티베트로 전파되어 총카파 교학의 기초가 되었다. 
부처가 핵심적으로 깨달은 내용이 12연기라는 상좌부 남방불교의 이론은 이 공관에 의해서 파하는데, 이를 파사현정(破邪顯正)이라고 한다. 초기불교에서는 아비담마와 팔정도가 중론이라는 입장이므로, 용수의 중론을 비판하고 있지만 그 부분은 여기서 논외로 한다. 초기불교의 비판이 타당한 설득력이 있지만, 또 나름대로 대승불교의 존재적 의미는 역사속에 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나가르주나의 <중론>은 귀류논증적 원칙이 몇 개 수반된다. 이러한 귀류논증은  우리의 고착화된 생각을 혁파하는데 동원되는 논리다. 나가르주나 등 대승학파들은 상좌부와 초기불교가 복잡하고 세밀하고 그래서 번쇄해졌다고 비판을 한다. 대자유란 논리로부터도 해방되는 것이며, 붓다의 경전이 글로 쓰여졌지만, 문장에 갇히지 않는 자유로움, 그것이 곧 사유의 해탈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나가르주나는 설득력있게 제시하는데, 문장의 이해보다는 오랜 사유의 과정이 필요한 깨우침의 논리다. 
중론이 저술된 것은 붓다 사후 붓다의 가르침이 언어 그 자체의 한계로 왜곡되어 이를 바로잡고자 쓴 책이라 할 수 있다. 즉, 언어로 표현된 진리의 한계와 모순을 논리적으로 밝힌 책으로 어쨌든 붓다의 말씀을 교조적 이념적으로 신봉해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부처 가르침의 핵심은 연기(緣起)론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는 것인데, 그런데 시간이 흘렀더니 이것과 저것이 있는 줄 아는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고 한다. 연기의 핵심이 이것과 저것이 서로 기대어 사태를 만들어내는 것을 묘사한 것뿐인데, 이것과 저것의 실체가 있는 줄로 착각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용수는 이를 강력히 비판했다. 붓다가 왜 그렇게 설했는지 근본을 생각해 보라는 것이지 그 말 자체를 신봉하라는 것이 아님을 언어가 가진 모순, 즉 논리적 한계를 밝힌 것으로 사고의 역설을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가 종종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할 때 그 상념의 막연함으로 답답할 때가 있다. 그것은 곧 존재를 존재의 아상(我想)에 사로잡혀서 생각을 출발하는데, 그러나 용수는 열반에 대해서 없어지지도 않고 도달되지도 않으며 끊어짐도 아니고 항상 있는 것도 아니며, 소멸하는 것도 아니고 발생하는 것도 아닌 것이라고 하였다. 열반은 존재 그것 자체가 아닌 것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열반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부처의 깨달음은 존재의 부조리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인간은 수많은 고통을 겪게 되는데, 용수는 그것이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無我)”는 사실을 진정으로 자각할 경우 모든 악업의 근원이었던 탐욕·분노·교만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고 또 이를 깨달을 경우 자신의 행동에 대해 행동을 했다는 생각을 내지 않는 것이며, 잘못을 짓지 않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네 가지로 요약되는데, 첫째는 모든 생명체의 삶은 궁극적으로 괴로운 것(苦)이라는 점이고, 둘째는 그런 괴로움의 원인(集)인 갖가지 번뇌와 어리석음에 대한 가르침이며, 셋째는 그런 번뇌와 어리석음을 제거할 때 만나게 되는 편안한 열반(滅)의 경지에 대한 가르침이고, 넷째는 그런 열반에 이르기 위해 실천해야 할 여덟가지 올바른 길(道)에 대한 가르침으로 이를 사성제라고 한다.
그런데 부처의 사후 약 500년이 지나면서 대승불교와 용수는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오해하기 시작하였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은 이렇다. 붓다 열반 후 그 가르침에 대한 수많은 주석서가 제작되었는데, 이러한 것을 아비담마(Abhidharma)라고 부른다. 아비담마 불교는 붓다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정리했지만, 이를 교조적으로 신봉하는 문제가 발생하였고, 붓다는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라 했지만, 이들은 붓다의 말씀에 갇혀버렸고, 이러한 불교 이해를 아공법유(我空法有:자아는 없지만 교법은 실재한다)라고 부르게 된다. 
아무튼 당시 소승의 그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대승불교주의자들은 붓다의 교법조차 존재하지 않는다(我空法空)고 주장하며, 이런 가르침이 담긴 경전들을 새롭게 발굴하고 편집하여 <반야경>이라는 이름으로 유통시켰다. 
대승론자들의 주장을 더 따라가보면 초창기의 붓다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無我)>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 <나라고 생각될 만한 것들>의 정체를 하나하나 살펴보라고 말씀했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는 몸이나 느낌이나 생각이나 의지나 마음 가운데 어느 하나를 나라고 생각하는데, 무엇이 나이기 위해서는 그것은 변치 않는 것이어야 하지만, 그러나 이 다섯가지 요소(五蘊)는 모두 무상한 것, 변하는 것이기에 나일 수가 없다고 한다. 이것이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의 가르침이라는 것인데, 교조적 아비담마 불교도들은 이런 무아의 가르침을 <나는 없지만 다섯 가지 요소는 실재한다>는 가르침이라고 착각하였다고 보았다. 십이연기의 가르침 또한 마찬가지로, 교조적 아비담마 불교도들이 이러한 가르침을 절대불변의 진리라고 집착하였다고 생각했다. 
용수는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고자 중론을 저술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중도는 <사상적 중도>를 의미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의 가르침에는 <사상적 중도>와 <실천적 중도>의 두 가지가 있는데, 실천적 중도란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자는 자기를 괴롭히는 고행만 해서도 안 되지만, 세속의 쾌락에 탐닉하거나 삼매의 즐거움만 추구해서도 안 된다’는 수행방법에 대한 가르침으로 고락중도(苦樂中道)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상적 중도는 무엇이 있다거나 없다고 보는 우리의 사고방식, 또는 무엇과 무엇이 같다거나 다르다고 보는 등의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을 의미한다. 이런 비판은 부처께서 깨달으신 보편법칙, 즉 ‘모든 것이 얽혀서 일어난다’는 <연기(緣起)>의 법칙에 토대를 두고 이루어지는데, 있다거나 없다는 양극단을 떠난 중간의 그 무엇을 제시하기에 중도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양극단 모두를 비판하기에 중도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부처의 가르침은 그 자체로 세간의 언어로 표현되는 순간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가 훼손되는 문제가 발생하고, 붓다의 <연기>란 ‘생명과 세계가 모두 얽혀 있다’는 진리를 의미한다. 우리가 이를 생각과 언어와 문자에 의해 표현하기 위해서는 낱낱의 단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어서 이 때 사람들은 낱낱의 단어에 집착하여 실체론적 사고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중론은 이론화된 불교, 언어화된 불교를 공의 논리를 통해 해체하는 책으로 보면 된다. 중론의 총 27장에서 다루는 개념과 이론들은 모두 다르지만, 그런 개념과 이론들이 해체되는 논리는 동일한데, 4구비판의 논리가 그것이다. 4구란 우리의 생각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네 가지 방향의 판단을 의미하는데, 첫째는 긍정이고, 둘째는 부정이며, 셋째는 긍정하면서 부정하는 것이고, 넷째는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 것이다. 이런 <4구비판의 논리>는 우리의 일상적 사고방식을 모두 허물어뜨리기에 ‘해체의 논리’라고 부를 수 있고 ‘반야의 논리’, 또는 ‘공의 논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중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무리한다. 
                                        
결과가 조건 속에 미래 존재했다거나,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모두 불가능하다.
미리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런 조건은 
무엇을 위해 있겠으며,
미리 존재했다면 그런 조건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이것으로 인하여 결과가 발생할 때,
이것은 연(緣)이라고 부른다.
만일 그 결과가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비연(非緣)이라고 하지 않겠느냐?
전체적으로 보든, 낱낱이 보든
조건 속에 결과는 없다.
조건 속에 없는 결과가
어떻게 조건이 아닌 것들로부터 
발생하겠는가?
그러므로 결과는 
조건이 만드는 것도 아니고
조건 아닌 것이 만드는 것도 아니다.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데
조건이나 조건 아닌 것이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속한 것>이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나>와 <나의 것>이 사라졌기 때문에
무아의 지혜를 얻은 자라고 부른다.
안에서건 밖에서건
<나>라든지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사라지면,
취착(取着)이 사라진다.
취착이 사라지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는 일도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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