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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산사에 있는 유물들 (8) 대흥사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사찰순례 (94)
가을색에 물든 대흥사 전경

최근 모항공사에서 이륙 직후 기체 이상이 있어서 비상착륙한다고 방송하고 회항한 일이 있었다. 무사히 착륙해서 다행이지만 이후 수동으로 착륙할 수 있는데 왜 ‘비상착륙’과 ‘기도하라’는 단어를 써서 승객들에게 공포감을 더 조성했는지에 대해 비판하는 얘기가 있었다. 차후 더 조사가 이루어지면 결론이 나오겠지만 아무리 경황이 없다 해도 위급한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에 아쉬움이 남는다.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20대 후반 무역 회사에 근무를 할 때 미국 출장을 갔다가 뉴욕 주에 있는 작은 공항에서 뉴욕의 존 F. 케네디 공항으로 가는 작은 프로펠러 비행기를 탔을 때였다. 공항에 다 도착했는데 착륙하지 않고 계속 공항 위를 선회해서 비행기가 많아서 순서를 기다리나보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착륙하려고 바퀴를 내리는데 바퀴가 나오지 않아 공항을 선회하는 것이었다. 한 30분쯤 지났을까 긴급 상황을 알리는 알람과 함께 기장이 연료를 다 소비한 후 동체 착륙을 시도하겠다는 안내방송을 했다. 다시 30분 정도 공항 상공을 돌며 연료를 소비하는 동안 착륙할 때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유리창으로 공항에 여러 대의 소방차와 병원차가 대기 중인 것이 보였다. 몇몇 사람은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차분하게 기다렸다. 속으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아니 “그래, 국내선이 아니라 미국 항공사니 보상금은 많이 나오겠다.”는 자조적인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왔을 때, 방송에서 기장이 동체 착륙을 시도할 것이니 두 팔로 머리를 감싸고 머리를 배 쪽으로 웅크리는 비상 착륙 자세를 취하라고 했다. 머리를 숙이고 잠깐 눈을 감은 순간 아나 길어야 몇 초의 시간인데 그 짧은 순간에 아주 오래 전, 아마 4, 5살 때부터 경험했던 일들이 사진처럼 연속해서 떠오르는데 아주 빠르게 지나다가 중요한 장면은 튀어 올라 잠깐 확대해서 보여주고 지나는데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몇 초만에 20대 후반까지 살았던 생활이 정리되었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로 유배 가면서 쓴 무량수각 현판


비행기는 바퀴가 안 나온 상태로 동체 착륙하려고 준비하다 마지막으로 기어를 작동했는데 다행히도 바퀴가 빠져나와 무사히 착륙했다. 말 그대로 구사일생이었지만 이후 오랫동안 기억에 남은 것은 그런 경험을 했었다는 것보다 짧은 시간에 20여 년간의 경험이 정리될 수 있다는 생각과 책에서만 보던 생사는 한 순간이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적어도 30대 때에는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갖지 않게 되었다. 만약에 다시 그런 일이 닥친다면 차분히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생각과 현재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더 충실하게 살자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자신이 경험한 것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우리 몸 어딘가에 숨어있다는 생각에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 말자고 다짐하게 되었다. 극도로 위험한 상황을 경험한 것이 이후 나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번 비행기 회항 사건으로 고통을 경험했던 분들도 그것이 비행기에 대한 두려움으로 기억되지 않고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원교 이광사가 쓴 대웅보전 현판


세계문화유산 산사 중 하나이자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전라남도 해남 대흥사는 임진왜란 때 활약한 큰 스님 서산대사의 금란가사와 발우를 모시고 있다. 서산대사가 묘향산에서 입적하기 전 자신의 의발을 보관할 곳으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후기 대흥사는 서산대사의 음덕으로 큰 사찰로 번창하면서 새 건물이 많이 지어졌다.
이 대흥사에 새로 지어진 법당들 중에는 유명한 서예가가 쓴 현판이 많이 남아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원교 이광사와 추사 김정희이다. 이광사나 김정희의 공통점은 둘 다 오랜 기간 유배 생활을 했다는 점과 당대를 대표하는 서예가라는 점이다. 조선시대 4대 명필을 꼽을 때 안평대군, 한석봉과 이광사, 김정희를 꼽기 때문에 이 또한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김정희가 온갖 영예를 누린 다음 55세부터 10년을 귀양살이 했다면 이광사는 역적 가문 출신이어서 벼슬에 못 나갔다가 50세부터 다시 역모에 연루되어 22년간 귀양살이를 했고 유배지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김정희가 이광사보다 80여 년 뒤에 태어난 후학이라는 점이다.   
대흥사만 아니라 호남에 있는 유명한 사찰에 이광사의 글씨가 특히 많이 남아 있다. 왜냐하면 이광사의 마지막 귀양지가 완도에 붙어 있는 신지도라는 작은 섬이었기 때문이다. 당대 최고의 명필이 귀양 왔다는 소문에 전라도에 있는 유명 사찰에서 그의 글씨를 받아갔던 것이다.  
대흥사에는 대웅전과 침계루, 천불전, 해탈문의 현판이 이광사의 글씨이다. 이광사가 죽고 9년 뒤에 태어난 김정희는 청나라를 다녀 온 후 자신만의 글씨체를 연구했고, 벼슬도 승승장구하여 오늘날 법무부 차관급인 형조참판에 이르렀다. 그런 그가 당시 세도가였던 안동 김씨의 견제로 제주에 귀양 가는 길에 친구 초의선사가 있는 대흥사에 들렀다가 대웅전 현판을 보게 되었다. 추사는 이광사의 독특한 글씨체인 동국진체가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놨다며 현판을 떼어내고 자신의 글을 걸라고 요구했다. 청나라에서 봤던 대가들의 글씨와 옛 비석 글씨를 통해 배운 자신의 글씨에 대한 자부심에서 나온 호기였다. 또한 거기에는 자신은 영조의 딸의 제사를 모시는 척족이자 노론 가문 출신이지만 이광사는 노론의 반대파인 소론 강경파 가문 출신에 역적의 가문이라 벼슬도 하지 못했다는 점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1856년 김정희가 죽기 며칠 전에 쓴 현판 <판전> 말미에 칠십일과병중작(七十一果病中作)이라 적었다.


하지만 김정희도 9년간의 제주도 유배에서 자신만을 돌아볼 시간을 가졌다. 그 사이에 아내도 죽었고, 제자 몇 명만이 자신을 찾아왔고, 할 일이라곤 책 읽고 제자를 가르치는 일과 글씨 쓰는 일밖에 없었다. 결국 그간 체득하고 있던 여러 글씨체를 종합한 자신만의 글씨체인 추사체를 이 유배 기간에 완성하였다. 자신의 글씨체를 완성하고 나니 전대의 선배인 이광사의 글씨가 새롭게 보였을까? 햇수로 9년 만에 유배에서 풀려 서울로 올라갈 때 추사는 다시 대흥사에 들렸다. 그리고 초의선사에게 예전에 이광사가 쓴 대웅전 현판이 있냐고 묻고, 있다고 하니 그때 자신이 잘못 보았다고 하며 그것을 다시 걸라고 했다 한다. 유배라는 고통의 시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어 놓은 것이었다. 김정희는 서울에서 잠시 머물다 다시 북청으로 1년 유배 갔다 풀려나온다. 그때 그의 나이 68세였다. 그리고 아버지 묘가 있는 과천에 살면서 삼성동에 있는 봉은사를 자주 찾았다. 마침 봉은사에 경판을 보관하는 건물이 완성되자 그에게 글씨를 부탁했고, 그렇게 그의 마지막 현판 글씨인 ‘판전’이 남겨지게 되었다. 
글씨를 잘 몰라도 제주로 귀양 갈 때 초의선사에게 써주었다는 ‘무량수각’이란 글씨와 죽기 며칠 전에 썼다는 ‘판전’은 조금 다르게 보인다. ‘무량수각’이 호탕한 무인 같다면 ‘판전’은 소박한 아이의 글씨 같고, 어쩌면 대흥사에 걸려 있는 추사가 지나치게 기교를 부렸다는 ‘대웅보전’ 글씨에 더 가깝다는 느낌이 든다.  
대흥사에 가면 사찰 순례를 다 한 후 김정희와 이관사의 현판을 찾아 비교해 보는 것도 즐거운 시간이 될 것이다.

제주불교신문  jejubulgy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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