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불교문학의 걸작 ... 산티데바寂天의“입보리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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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문학의 걸작 ... 산티데바寂天의“입보리행론”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11.06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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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의 전통적 공관(空觀)으로 육바라밀 실천을 통한 입보리행의 길 제시

기쁨의 원인이며 
수승한 정법을 버리고
그대는 어째서 괴로움의 원인인 
감각적 쾌락만 즐기고 있는가?
공덕으로 인해 건강하고, 
지혜로 인해 마음이 즐거우면
다른 이들의 이익을 위해 
윤회에 머무른다 해도
연민과 자비의 마음을 지닌 이가 
무엇 때문에 슬프겠는가!

산티데바(Shantideva) 본명은 산티바르마Santi-varma)이며, 한자로는 적천(寂天)이다. 산티데바는 출가하여 날란다 대학에서 공부한 학자였으며, 중관학파의 계보를 이은 수행자였다. 나가르주나(용수)가 창시한 중관학파의 사상은 공사상에 바탕을 둔 불교철학이다. 산티데바는 사우라아슈트라국에서 왕자로 태어났으나, 해탈불모가 문수보살의 머리 위에 물을 뿌리며,“왕국은 지옥의 열탕과 같다”고 말하는 꿈을 꾼 뒤 왕위에 오르기 하루 전 몰래 왕궁을 떠났다고 한다. 저서로는〈입보리행론〉,〈대승집보살학론〉,〈경론〉등이 전해진다.

산티데바는 승원대학이던 날란다의 지나데바 승원장에게 출가하여 정식 비구승이 되었다. 이후 수행정진을 해서 문수보살의 현몽으로 지혜의 상징인 검(劒)을 받는 성취를 비롯해 여덟 가지 깨달음을 차례로 성취하였다. 밀법인 탄트라수행을 성취한 그는 비밀스럽게 수행을 했다. 그런데 겉으로는 대학에서는 언제나 밥만 먹고 잠만 자는 것처럼 행동하는 무위행(無爲行)을 했다. 주변사람들로부터 먹고 싸고 자는 것 밖에 모르는 ‘세가지의 달인’이라는 뜻의 ‘삼행자(三行者)’라는 비난을 듣기도 하였다. 
어느날 나란다사(대학)의 전통인 큰스님들이 경을 외우는 법회가 있었는데, 산티데바의 차례가 되었다. 그를 쫓아내려던 대중들은 구실을 잡고자 ‘지금까지 없었던’ 법문을 청했다. 그때 산티데바가 설했다는 것이 바로 <입보리행론>이다. 이 법문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수만 채록해 아름다운 운문으로 정리했다. 이를 두고 산티데바를 불교의 핵심사상을 뛰어난 시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설에 의하면 산티데바는 <입보리행론>제 9장 지혜 바라밀품 34장의 ‘만일 사물과 비사물들이 마음 앞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때 형상(形相)은 구분이 없어지고 대상(所緣)이 존재하지 않아 완전히 평정되리라’는 게송을 설할 때 대중들의 눈에서 사라지는 기현상을 보였다고 한다. 우주가 비물질에서 물질이 나왔다고 하는데, 눈에 안보이는 비물질로의 현화는 결국 ‘공(空)’을 체득했다는 은유적 기록들일 수도 있다. 불가에서는 공성을 체득한 사람에게는 존재의 형상에 따른 집착이 의미가 없다. 내가 없으니 형체도 없고 대상도 없다. 사리분별하는 나도 없어지고 분별 대상인 객관적 물질도 없으니 모두가 공하다. 
전설에 따르면 산티데바의 몸은 사라지고 음성만 들려오는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상태로, 없어져도 없어진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의 제자가 되려고 몰려들었는데, 산티데바는 그들을 위해 그동안 저술한 <대승집보살학론(大承集菩薩學論)>과 <제요경집(諸要經集)>을 펼쳐 보이며 정진할 것을 당부한다. <대승집보살학론>은 보살의 길을 가도록 육바라밀의 실천에 대한 안내를 담은 것이며, 제요경집은 경전의 핵심을 정리한 것이다.  
그후 산띠데바는 많은 기적을 행했다고 하는데, 인도인들이나 티베트인들이 그러한 영웅담을 좋아하는 문화적 경향의 과장일 것이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남방전승 불교와는 달리 큰 예외가 없다.  
명상수행에 대하여 산티데바의 <입보리행론>에서 아름다운 시적 게송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나와 내 것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리고 소유물 등의 갈망 때문에 
세속의 삶을 버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러한 것들을 
완전히 버릴 것이다.
지혜로운 이는 이와 같이 행동한다.

지(止, smatha)에 제대로 들어가 
관(觀, vipasyana)으로
번뇌를 완전히 정복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나서
지(止)의 수행을 먼저 해야 한다.
이 지(止)의 수행은 세간의 집착을 
버리는 큰 환희를 통해 완성한다.

중생에게 집착한다면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모두 가로막히며,
윤회하는 삶이 싫어 떠나겠다는 
염리심(厭離心) 역시 퇴보하고
끝내 불행으로 고통 받을 것이다.

중생이 윤회로부터 해방된다면,
모든 것이 기쁨의 바다이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나 혼자만의 자유를 원하는 일이 
무슨 소용인가?

나의 행복과 다른 이들의 괴로움들을
완벽하게 맞바꾸지 않는다면,
불성을 이룰 수 없을 뿐더러,
윤회의 바퀴 속에 살면서 행복은 없다. 

불교 대부분의 학파는 모두 개개의 자아, 즉 ‘나’라는 개념이 오온(五蘊)에 의존해서 일어난다는 데 동의한다. 그들은 오온에 의지하지 않는 독자적이거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아에 대한 믿음을 거부한다. 그러나 무아(無我)의 이론은 개별적인 ‘나’의 부정에서 더 나아간다. 즉 반드시 모든 현상이 공하다는 것, 또는 모든 현상에 자성이 부재하다는 것을, 그리고 모든 현상은 극도로 미묘한 존재의 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대승론자들은 소승론자들을 낮은 단계의 수행자라고 폄하한다. 소승들은 자신들의 수행과 이기적인 깨달음에 집착하며, 사회문제에도 관심이 없고, 이웃들의 성장에도 관여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휴머니즘운동을 주도한 19세기 유럽의 철학자들은, 상좌부불교를 중심으로 이해한 차원에서 ‘허무주의’의 종교라고 비판한다. 윤회를 끊고 모든 사람들이 적멸(열반)에 들어간다면, 이 지구에 생명들은 살아남을 근거를 상실한다는 것이다. 생명의 본질인 ‘욕망’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불교에 대해 이미 ‘욕망’적 DNA를 가진 존재적 부정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허무주의’와 ‘자기부정’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현대 철학적 인간학의 창시자인 막스 셸러(1874-1928)는 <우주에서 인간이 지위(Die Stellung des Menschen im Kosmos)>에서 붓다의 구제론을 실례로 들면서 순수한 지향이 갖는 정신의 에너지화를 부정한다. 현실에 주어진 사실은 저항의 고통이라고 본 붓다의 통찰을 보면서, 셸러는 인간의 현 존재적 특성인 욕망(탐욕)의 주체를 적멸로 소멸시키는 것에 주목한다. 현실을 이탈한 관조적인 차원에서 본질세계를 성취한 붓다는 적멸(寂滅), 즉 서양철학용어로는 <허무>의 실현이거나 불교의 신화적인 표현으로는 <열반>을 인간의 성자적 완성으로 보았다. 셸러는 그래서 붓다가 인간에 있어서나 세계근거에 있어서 <텅빔>, <고요한 적멸>, <탐진치의 완벽한 사라짐>의 경지를 보였지만, 긍정적인 정신적 이념은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붓다의 이러한 궁극에 도달하는 기술적인 부분, 즉 위빠사나나 분석적 명상의 기법을 고뇌를 극복하는 신성한 기술의 지식으로 생각했으며, 그러한 탈현실의 기술을 통해서 욕망, 갈증을 내면적으로 지양(止揚)하여 감각적 현실세계와 육계의 심리작용(마음작용)이 소멸되게 하는, 즉 존재의 감각적 형상관계나 공간성과 시간성을 차례로 떨어져 나가게 하는 인과적 질서를 통찰하는데 그쳤다고 설명한다. 그 이상의 정신적 지향이나 적멸의 이념이 무엇인지 우주에서의 인간의 지위라는 차원에서 인간의 의미, 즉 철학적 인간학은 부족하다는 것이다. 
니체도 불교를 허무주의로 규정하고 있다. 본래 허무주의라는 용어는 19세기 초 유럽에서 형성이 된 철학이론으로, 절대적인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상을 말한다. 이 사상은 곧 바로 윤리에서 원래보다 훨씬 단호한 의미까지 내포하게 되었다. 즉 모든 진리나 도덕적 가치를 부정하는 사상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정치에도 개인에게 행사되는 어떠한 사회적 구속도 거부하는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허무주의는 러시아 혁명주의자들이 주장하여 실제로 계급투쟁에 이용했다.
부파불교시대의 불교 우주관에 따르면 생사윤회의 세계는 욕계·색계·무색계의 3계로 구성되어 있어, 욕계는 욕망을 벗어나지 못한 중생들이 머무는 세계로서 33천(天)들이 머무는 6욕천(六欲天)도 포함되어 있다. 색계는 욕계를 벗어난 신들이 머무는 곳이며 선정(禪定 dhyāna)을 닦은 사람이 깨달음 없이 죽는 경우 태어나는 곳이다. 신체는 존재하지만 육체적 욕망은 없는 세계다. 무색계는 신체나 장소가 없는 정신적 세계로서 공무변처(空無邊處)·식무변처(識無邊處)·무소유처(無所有處)·비상비비상처(非相非非想處)의 4처가 있다.
이러한 존재방식은 일반적인 인간의 생명론으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과학과 철학적 사유로는 증명되지 않은 세계인 것이다. 그 단계를 가보지 않은 사람이 보기에는 이론적인 추론들일 뿐이다. 
불교에서는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을 모두 그릇된 견해라고 본다. 특히 불교에서 무아를 잘못 이해하여 “죽고 나면 모든 것이 없다.”라는 생각과, 윤회의 사슬을 끊고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에 대하여 허무주의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경계한다. 오온(五蘊)이나 무아(無我) 또는 십이연기에 대한 것을 이러한 존재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불교에서는 올바른 접근법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즉 존재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과, 그 결과에 대해 ‘허무주의’로 유추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대승불교는 그래서 현세로 눈을 돌리고, 생명의 존재적 행복을 주요 대상으로 수행한다. 
샨띠데바의 법회에 참여한 대중들이 그의 가르침을 결집한 것이 <입보리행론>이다. 산스크리트 원전만 전해져 오는데, 아름다운 시로 문장마다 깊은 통찰과 각성을 주는 심오한 이 책은 대승불교문학의 최고 걸작이다. 사상의 심오함과 번역의 난해함으로 이 책은 주석서가 130여권이 넘는다고 한다. 10세기에 천식재(天息災)가 번역한 한문본에는 용수(龍樹)가 지은 것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용수는 산티데바보다 훨씬 앞선 세대의 인물이니 신빙성은없다. 한역본에는 내용도 축소되고, 빠진 부분도 많다. 18세기에 티베트어 문법의 거장 시뚜 린포체(Situ Rinpoche)가 내용 전부를 정리해 데게판(Derge Edition) 땐규르(티베트불교에서 붓다의 말씀 그 자체를 ‘깐규르’라고 하고 이에 대한 학승들의 주석을 ‘땐규르’라고 한다)를 만들었는데, 현존하는 것중 가장 믿을만한 것이라고 한다. 이 책은 우리나라 승가대학에서도 2013년부터 정식 교재로 채택했다. 
티베트역본 제목은 <입보살행(入菩薩行)>이며 한역본은 <보리행경(菩提行經)>이다. 보살로 들어가기 위한 보살행, 즉 보리행에 대한 경전이다. 대승의 깨달음을 구하는 이들에게 교훈을 주는 육바라밀에 대한 내용이 중심이다. 원전은 모두 10장 971송(頌)이며, 보리심을 일으키고, 없어지지 않도록 지키고, 이후에 더욱 증장시키기 위한 내용들을 순서대로 담고 있다.
제1장은 보리심의 공덕을 찬탄하는 내용이다. 제2장 <죄업 참회품>에서는 보시바라밀과 함께 보리심 수행을 위해 장애가 되는 것을 제거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제 3~5장은 지계바라밀과 관련하여 <전지품>, <불방일품>, <호계정지품>등의 일종의 예비수행단계를 설했다고 한다. 제6~9장은 각각 인욕·정진·선정·지혜바라밀을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추정되는 제10장은 보리행을 하는 제불(부처)과 보살을 찬양하며 이 모든 깨달음을 ‘중생구제’ 즉 중생과 함께 나누겠다는 <회향품>이 나온다.
티베트의 법왕 달라마라마는 이 책에 대해 “보리심(일체중생을 위해 깨닫겠다는 마음을 내는 것)에 대해 설한 것 중 이보다 더 뛰어난 논서는 없다.”고 말했다. 그만큼<입보리행론>은 수많은 불교 논서 가운데서도 보리심에 대해 가장 자세하고 광범위하게 논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책이 한국에 소개된 이후 <법구경>과 <숫타니파타>에 이어 불자들이 가장 애독하는 경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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