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수도원 “파하르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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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수도원 “파하르푸르”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11.06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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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군주 팔라왕조가 꽃피운 대승불교의 중심지 팔라식 불교미술과 단아한 예술을 꽃피우다

부처님의 올바른 가르침 벗어난
힌두식 불교로 소멸의 길 걸어 
탄트라불교로 전이되어 쇠퇴하다
12세기 이슬람 침입으로 몰락해

8세기 방글라데시 땅을 불교가 지배하던 시절 지어진 높이 24m, 면적 8만5000㎡ 규모다. 길이와 너비 모두 300m에 이르는 정사각형 모양을 갖췄으며 두꺼운 벽돌로 된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사원 중앙에 탑이 있고, 주위로 177개의 승원이 이를 감싸고 있다. 대승원 각 면의 중앙부에는 출입문이 있고, 내부에는 승려들의 방과 식당, 주방, 사당 등이 자리하고 있다. 건물 외벽에는 조각이 새겨진 점토판으로 장식돼 있어 당시 문화를 짐작하게 해준다. 3층 및 2층 일부가 소실돼 온전한 모습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기단부에 남아 있는 수천 장의 점토판만으로도 농민, 음악가, 무용가 등 당대의 인물과 소박한 삶의 형상을 엿볼 수 있다.

방글라데시는 이슬람국가지만, 불교, 힌두교 유적도 도처에 산재해 있다. 그중에 파하르푸르에는 방글라데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불교유적지 가운데 하나인 소마푸라 마하비하라(Somapura Mahavihara)가 있다. ‘위대한 수도원’이라는 뜻을 가진 이곳은 대승불교가 꽃피던 시절 인도와 방글라데시에 있던 5개의 승려 교육 기관 가운데 한 곳이다. 이 승원은 불교 진흥기인 7세기경 인도 팔라 왕조 시절에 처음으로 세워졌고, 12세기까지는 전 세계의 승려들이 모여들던 곳이었다. 
팔라 왕조(Pala dynasty)는 750년부터 1174년경까지, 인도 북동부 지역(벵골 지역과 비하르 지방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지배한 불교 왕조다. 수도는 파탈리푸트라였다.
7세기 후반에 바르다나 왕조가 멸망한 후, 벵골 지역과 비하르 지역은 무정부 상태에 빠져 북동쪽 인도의 프라티하라 왕조와 데칸의 라슈트라쿠타 왕조의 침입도 있었고, 이 지역은 물고기의 법률로 알려진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곳이 되었다. 따라서 이 지역의 혼란을 수습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 각지 명사들의 공식적인 선거로 750년에 고팔라(750~780)가 왕으로 선출되었다. 


이 왕가의 조상들은 명료하지 않다. 라자푸트라 왕조가 그 조상을 신화와 사자의 영웅으로 미화시키는 것에 비해 조상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고 있다. 추측컨대 크샤트리아도, 브라만도 아닌 바이샤나 수드라 계층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래서인지 팔라 왕조의 역대 왕은 불교를 보호하였고, 당시의 북부 벵골에는 비하라(사원)가 많았기 때문에, 이후의 비하르의 어원이 되기도 하였다. 바로 이곳에서 8세기 후반에 인도 철학의 거장 샨타락시타와 대밀교 수도승 파드마 삼바바 등을 불교 사절로 티베트에 파견했다. 팔라 시대의 불교는 밀교가 번성하여 소위 ‘탄트라 불교’였기 때문에, 티베트 불교도 그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또한 예술을 보호하였기 때문에, 회화, 조각, 청동 주물 기술이 크게 발전하여 불교 미술에서는 ‘팔라식 불상’을 만들어 세계적으로 유명해졌고, 그 예술은 ‘팔라파’와 ‘동방파’라고 하며 뛰어난 기교와 단아한 디자인으로 알려져 있다. 

팔라불교미술은 회화, 청동주물, 조각, 건축 등에 단아하면서도 뛰어난 기교로 정평이 나있다.


7세기 인도는 순수불교가 쇠퇴하면서 탄트라불교(밀교)가 새로운 사상적 조류가 되던 시기다. 밀교는 날란다대학의 동쪽 지역인 비크람쉴라와 파하르푸르에서 찬란한 꽃을 피웠고, 티벳으로도 전파되었다. 따라서 이곳은 탄트라 불교의 진귀한 유적지로 큰 의미를 갖고 있는 곳이다. 
인도는 수행에 의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배치되는 바라문교의 여러 신들이 습합되고 또 수호주(守護呪) 따위가 독송되고 있었다. 7세기에 들어와서 화엄경 등 대승불교의 경전을 기반으로 하여 바라문교와 기타 민간종교의 주법(呪法)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밀교가 성립되었다. 

힌두교와 밀교의 영향이 혼재된 기단부의 부조들. 파하르푸르 승원은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이지만, 우리나라와 유럽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초기불교에서는 금지되었던 세속적 주술이나 비의(秘儀)가 차차 인도 불교 속에 침투되었는데, 특히 재가신자를 중심으로 일어난 대승불교에는 그 경향이 강하여 대승경전 속에 다라니라고 부르는 주문이 삽입되고 후에 이것이 하나의 독립된 경전으로 발전한다.
한편, 부처의 법신이라는 가르침도 그 범신적 경향으로 신비주의와 연결된다. 이리하여 대승불교의 새로운 전개로서 금강승이라고 부르는 밀교의 교의가 성립되고, 7세기경 그 교의를 설한 <대일경>이나 <금강정경>이 나타났다. 이러한 밀교는 자기수행이라는 면이 적고, 현실긍정적이라는 면에서 대중들에게 급속히 확대되었으나, 현세의 행복추구가 동시에 쾌락추구라고 하는 도덕적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후에는 남녀의 결합을 신성시하는 좌도밀교(左道密敎)를 낳아 인도불교 멸망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밀교는 힌두교의 일파인 시바의 여신 샤크티(性力)를 숭배하는 샤크티파와 결부되어 성(性) 숭배 신앙과 겹쳐서 비외(卑猥)스러운 성적비의(性的秘儀)에 떨어지는 수가 많았다.
더불어 12세기말부터 13세기 초에 이슬람 세력이 침입하여 불교의 중심지였던 비하르지 방을 점령하고 밀교의 본거지였던 비크라마시라 사원을 비롯하여 많은 불교사원을 파괴하고 많은 승려를 죽였다. 이렇게 하여 불교는 내외적으로 쇠퇴가 촉진되어 인도 땅에서 쇠망하게 되었다. 파하르푸르의 불교문화도 12세기 이슬람의 침입으로 승려들이 몰살당하면서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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