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위한 대승적 구도자의 길
일본에 한국불교 위상 높이고
숭유억불 조선에서 법맥 잇게 한
묵향의 간절함을 가슴에 담다
10월 15일부터 11월 17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본 교토 고쇼지[興聖寺] 소장 사명대사 유묵遺墨>을 특별히 공개하는 전시회를 관람했다.
사명대사(1544-1610)는 조선 중기 불교계를 대표하는 선승(禪僧)이며 임진왜란 때 의승군(義僧軍)을 이끈 승병장이다.
이번에 전시된 사명대사 유묵은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후 강화와 포로 송환 협상을 위해 일본에 갔을 때 교토에 머물며 고쇼지의 승려 엔니 료젠(円耳了然·1559~1619)에게 남긴 것이다. 엔니는 금강산에서 도를 닦은 큰 승려가 왔다는 말에 선종의 가르침에 대한 10개 질문과 답변을 정리한 ‘자순불법록(諮詢佛法錄)’을 교토 혼포지에 머물고 있던 사명대사에게 보여주고 자신이 잘 해석하고 있는지 의견을 물었다고 한다. 이후 서로 친해지자 엔니는 사명대사에게 ‘도호(道號)를 써달라’고 했고, 이에 사명대사는 ‘허응(虛應)’과 ‘무염(無染)’이라는 자와 호를 지어주었다, 사명대사는 엔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허응과 무염으로 지어 관세음보살이 두루 중생의 소리를 듣고 살핀다는 뜻을 담았으니 잘 새겨서 마음에 간직하라”고 당부했다. 엔니는 사명대사와 인연으로 일본불교계에서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고 한다.
이번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것은 <승려 엔니에게 지어 준 도호>와 <자순불법록> 등 7건 7점이다. 특히 이 유품들이 주는 의미는 조선과 일본의 평화를 이끌어 백성을 구하고자 한 마음과 구도자로서 승려의 본분을 잊지 않으려 한 숭고한 뜻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 1000여명을 이끌고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후 사명대사는 스승인 서산대사의 부장이 되어 군량과 제반 병기를 마련, 손질하고 왜적을 무찔렀다. 마침내 선조는 “승장 유정에게 당상관의 상급을 내리라”는 특명을 내렸다. 이때 실록을 쓴 사관은 “전란을 당해 날래고 건장한 장수들조차 두려움에 떨었는데 엄청난 전공이 도리어 죽을 날이 머지않은 늙은 승려에게서 나왔다”며 “이것이 어찌 무사들만의 수치이겠는가”라고 감탄했다.
대사는 그후 4차에 걸쳐 적진에 뛰어들어 적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회담을 펼쳤으며,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선조의 특명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인들은 사명대사를 보자 “저 스님이 설보(說寶)화상”이라고 환영하며 존경했다.
‘설보화상’이란 지난날 사명대사가 가토 기요마사 진영에서 가토를 보고 “네 머리가 보배다”라 한 것에서 나온 말이다. 사명대사는 협상끝에 일본에 잡혀 갔던 3천여 명의 조선인을 데리고 돌아온다.
나라를 위하고, 끌려간 조선인들의 애민적 행보에 사명대사가 남긴 임진란 때의 업적을 되새기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한국불교가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불교의 위상을 드높여 법맥을 잇게 한 것에서 가슴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