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규 화백의 나의 수행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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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규 화백의 나의 수행록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11.13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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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거룩한 고요
김대규 화백은 1987년 광주 남도예술회관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 후로 미국과 중국, 인도, 네팔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에 걸쳐 총 20회의 개인전을 가진 중견화가이다. 이뿐만 아니라 국가지정중요무형문화재 5호 판소리 고법 이수자로 지난 2010년에는 제주아트센터에서 3시간에 이르는 수궁가를 완창했다. 저서로는 시화첩“지금도 부르고 싶은 사랑가”, 판소리수궁가 사설집 등이 있다. 현재 사단법인 로천 예악진흥협회 이사장으로 있으면 우리 예술의 깊이 있는 매력을 전하는데 힘쓰고 있다. 평생 불교신행과 다양한 수행을 해 오던중 기존의 수행법으로는 큰 성취를 이루기 어렵다는 자각에 따라 지난 2014년부터 미얀마 쉐우민명상센터에서 위빠사나 수행을 하였고, 이듬해부터 파욱명상센터에서 수행을 해오고 있다. 앞으로 총 6회에 걸쳐 수행의 체험적 이야기를 소개하여 불교수행에 대한 도움을 주고자 한다. /편집자 주

고요! 그 고요에 들었을 때 고요에 드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고요에서 나갈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그냥 그 고요 상태에 적셔져서 잠겨 있을 뿐인 것이다. 굳이 표현을 하란다면 깊은 바다 속의 맑고 부드러운 물결 속이거나 엄마 품에 잠든 갓난아기의 속눈썹이거나 현미경으로 보이는 세포조직의 은밀한 부드러움이거나.... 아마도 부처님이 사시는 예쁜 정원을 노니는 것 같은 것이다. 

 

명상이란 것이 참으로 좋은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자리에 앉아 명상을 시작했다. 그렇게 한다고 누구나 다 명상이 잘 되어서 그저 쉽게 목적한바 평화와 행복을 얻고 지혜와 깨달음을 갖게 되지는 않는 것 같다. 
일단 앉아보는 것 자체가 명상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또 그것까지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겠으나 그 시작만은 분명 대견한 일임은 확실하다. 나도 그 대견한 일을 해보고자 자리에 앉았다.
지그시 눈을 감고 내 자세를 점검한다. 앉아 있는 양쪽 엉덩이에 몸의 무게가 균등히 편안한가, 꼬리뼈가 정위치에 있으며 곧추 서 안정한가. 양 어개로부터 양 팔이 곧바르며 등허리가 곧추서 안정한가? 양 어깨로부터 양 팔이 등뼈로부터 대칭으로 잘 뻗어 내렸으며, 평안하고 자연스러운가? 목뼈가 직승으로 곧게 서서 턱이 내밀지 않고 적당히 당겨져 두개골 정수리 백혈점이 하늘을 곧 닿았는가? 몸 전체가 혹은 어느 한 부분이라도 힘이 들어가거나 거북하지 않고 편안하며 안정된 상태인가? 그렇지 않은 부분이 느껴진다면 바로 자세를 고치거나 보정하여 스스로 안정된 자세를 갖추어야 했다.
여기까지가 몸의 준비일 것이다. 곧 이어서 하고 있는 호흡을 점검한다. 들이 쉬거나 내쉬거나 깊은 숨이거나 가볍고 짧은 숨이거나 콧구멍 끝에서 들고 나는 숨 바람을 검문하듯 느껴본다. 
이쯤에서 반드시 마음을 바라보아야 한다. 내 마음이 편안한지 곰곰이 살펴보아야 한다. 무언가 바쁜 일을 두고 조급해 하거나 방황하는 마음이 숨어 있거나 할 수 있다. 이러한 걱정거리들은 하나하나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이러한 장애들은 약해지거나 사라지는 것이었다. 간혹 잘 사라지지 않는 장애가 있었지만 반복함으로 사라지기 일쑤였으며 그 장애를 억누르거나 억압하여 사라지게 하려하지 말고 그냥 알아차림만을 계속 반복하면 장애는 없어지기 마련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 그 알아차림이라는 것은 순수해야하며 탐심에 물들어 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제부터 명상이라는 것을 본격적으로 실천되기 때문이다. 
많은 명상실패자들이 이 단계를 넘지 못하여 헛된 시간을 보내고 명상을 놓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삽화.제자 김대규


그렇게 하여 명상을 이어가다보면 흐르는 시간을 망각할 수도 있고, 내 몸이 어떤 자세인지를 잊을 수도 있고 호흡에 집중하던 것을 망각하고 망상에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망상이나 엉뚱한 다른 생각에 빠졌다고 인지되면 그 망상을 제쳐두고 다시 호흡에 집중하면 된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거나 실수했다고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다. 행여 다리가 저려서 참기 힘들만큼 고통이 온다면 애써서 그것을 참고 있지 말고 자연스럽게 발을 바꾼다던지 약간 움직거려본다든지 하는 것도 무방하다. 그것이 잘못된 것이 절대 아니다. 누구나 그럴 수 있고 모두가 그렇게 한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자연스럽고도 우연하게 스스로 느끼게 된다. “편안하다는 것이거나 고요하다는 것을~~~” 그것을 느끼는 동안 머릿속의 명쾌함과 온몸의 평안함에 내가 쌓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은 곧 고요에서 동반한 것이란 것도 자각하게 되었다. 
여기서 알고 있어야 할 주의점이 있다. 그것은 혼침이다. 혼침은 명쾌함이나 편안함이 없고 몽롱하거나 그저 나를 잊는 졸음이거나 멍한 상태일 뿐이다. 혼침을 알게 되면 망상하다가 이를 깨닫고 호흡으로 집중하듯이 자연스럽게 호흡으로 집중하며 명상으로 돌아오면 된다. 
혼침 역시 누구나 하게 되는 자연스러운 대상일 뿐 잘못하거나 실수한 것이 아니므로 낙심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앉아 있다 보면 누구나 쉽게 고요가 찾아옴을 느끼게 될 것이다. 
고요! 그 고요에 들었을 때 고요에 드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고요에서 나갈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그냥 그 고요 상태에 적셔져서 잠겨 있을 뿐인 것이다.
굳이 표현을 하란다면 깊은 바다 속의 맑고 부드러운 물결 속이거나 엄마 품에 잠든 갓난아기의 속눈썹이거나 현미경으로 보이는 세포조직의 은밀한 부드러움이거나.... 아마도 부처님이 사시는 예쁜 정원을 노니는 것 같은 것이다. 
그러한 시간을 얼마나 유지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관건이다. 왜냐하면 그 상태라는 것이 명상 발전의 중요한 조건이 된다는 것을 내 명상 중에 스스로 느껴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상태란 명상의 모든 과정에 기본 조건인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고요 속에 존재하는 것이 영원했으면 하는 갈망이 생겨 여기서도 새로운 탐진치(貪瞋痴)에 빠지는 꼴이 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 고요는 오래가지 못하고 금새 깨지고 방금 사라지곤 했으나 계속 반복하던 중 어느덧 30분이 넘고 한 시간 가까이 그럴 수 있어서 마냥 행복하고 즐거웠던 것을 기억한다. 
그럴 즈음이라고 생각한다. 그 심오한 고요를 만끽한다고나 할까? 흠뻑 빠져있을 즈음, 눈앞에 부드러운 환한 빛의 작은 원반처럼 생긴 회색광채가 나타났다. 
그것은 움직이지도 않고 빛이 변하지도 않고 소리가 나지도 않고 그냥 그 고요와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꼭 예전부터 있었던 것처럼....
나는 그 광채에 집중하며 그 광채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광채는 점차 희미해지거나 시들해져 마침내 사라지곤 했다. 그러기를 몇날 며칠 반복하고 있었다. 스승에게 물어보니 그 광채를 보지도 말고 그냥 원래대로 하던 대로 인중에 신경 써서 호흡집중만 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코앞에 선명한 광채를 어찌 보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그것을 모른 척 하고만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것도 훈련이었다. 수십 번을 실패하고 반복하다보니 그것이 가능해졌다. 더욱 신기로운 일은 그것을 보지 않고 집중을 하지 않으니 그 광채가 더욱 밝아지고 또한 점점 더 오랫동안 유지되고 그곳에 존재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더욱 밝고 더욱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해 무관심해야 한다는 원리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실재가 그랬다. 그리고 그것은 수행자만이 가질 수 있는 그 거룩한 고요 속에서 이루어지는 찬란하기 그지없는 시방세계의 환희가 아니겠는가?
사두! 사두! 사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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