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부 대승경전-지혜를 완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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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부 대승경전-지혜를 완성하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11.20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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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의‘지혜’는 모든 산만한 사유 일소하고 진정한 평화 추구
‘인무아’를 모든 사물에‘무자성’이라는‘공’의 개념으로 확대

대반야바라밀다경 초조대장경 권110 1축 목판 간행본 <반야경(般若經)>은 원제가 프라즈냐파라미타 수트라(prajnaparamita sutra)이며, 한역 원제는 <반야바라밀다경(般若波羅蜜多經)>이다.‘반야바라밀다’는 이상의 피안(彼岸)에 이르는 최고무상(最高無上)의 지혜(반야)라는 뜻이며, 그 지혜는 일체의 존재 그 자체의 본질을 상정하여 실체시하려는 고정적 인식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상대적인 관계성, 즉 공(空) 또는 연기(緣起) 로 보는 인식이며, 이 사상은 모든 대승불교 사상의 기초가 되었다. <반야경>은 지혜(반야)를 주제로 한 경전을 총칭하며, 당나라 현장은 이 경전들을 한역하여 <대반야경> 600권 일대총서(一大叢書)를 내놓았는데, 오늘날 가장 널리 독송하는 <반야심경>과 호국 경전의 하나인 <인왕반야경(人王般若經)>은 <대반야경>에 포함되지 않았다. 대표적인 <반야경>은 가장 긴 <십만송반야>, <대품반야>라고 불리는 <2만5천송반야>, <소품반야>로 불리는 <8천송반야>, <금강반야>로 불리는 <3백송반야>, 밀교색이 짙은 <이취반야> 등 있다.

 

경전숭배는 탑이나 사리 숭배와 같이 일종의 부처님 숭배와 같은 뜻으로 인식된다. 대승불교의 원초적 모습을 수천년 동안 간직하고 있는 네팔불교도들은 경전에 집중하는 의식을 지속하는 것이 중요한 일신의 수행이면서 집단의 신행 활동이다.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도 <팔천송반야경> 같은 것을 사경함으로써 제도(諸道)의 방편으로 삼는다. 즉 경전이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종교적 실천행위를 담고 있으며 정신적 실천행위를 위한 안내서이다. 그러나 보통의 책은 독서를 위한 것인데, 대승경전들은 공간과 시간이 거대하게 확대되고 융합하고, 때로는 압축되고 비밀스러운 관념들이 서로 얽혀 있기도 하다. 불경은 순서대로 읽는 소설책과는 자뭇 다른 책이다. 
초기의 대승경전들은 인도중부지역의 방언들로 되어 있다가 점차 산스크리트어로 다듬어졌다. 반야부 경전들이 중인도와 남인도에서 기원했다는 설은 <팔천송반야경>에 부처님 열반 후에 반야바라밀이 남부로 유포될 것이고, 거기서 동부와 북부로 유포될 것이라는 주장을 근거로 한다. 그러나 또 다른 학자들은 중앙아시아 코탄 지역이 반야부 경전의 출현지라고 주장한다. 대승의 출현기에 그리스와 지중해문화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1세기경 쿠샨 왕조때 대승불교가 크게 흥성했다는 사실은 있지만, 거기서 기원했다는 증거는 없는 편이다. 
대승불교의 기원은 반야부 경전의 출현과 관계가 깊다. 고고학적 차원에서 보면 대승불교가 인도의 북부지방에서 기원했다는 설이 설득력이 있다. 대승부 경전들이 인도 남부의 신화를 흡수하면서 남방기원설이 제기되었지만, 천계의 보살신앙은 북인도의 철학적 관념의 사유라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반야부 경전에는 신화와 철학이 혼재되어 있다. 즉 종교적 신앙의 신화적 요소와 철학적인 부분이 혼합된 것이다. 종교적 측면이 강한 것은 정토계 경전들이며, 이는 중.남인도를 근거지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중요하지 않다, 대승경전은 이 둘을 통합하려는 노력의 일환이기 때문에 반야부 경전의 생성과 관련된 지역을 구분하는 것은 부차적이다.
반야부 경전들은 시기별로 대개 기원전 100년부터 기원후 100년 사이에 기본 텍스트를 정교화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 이후 200여 년간 그 경전들이 크게 확장이 된다. 그러다가 서기 500년까지는 짧은 경전을 통한 기본적인 사상만 추려지다가 게송들로 요약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서기 600년~1200년 사이에는 탄트라불교의 등장으로 반야부 경전이 쇠퇴하는데, 경전에 주술적인 신비적 요소들이 삽입되면서이다. 이러한 양상이 나타나는 대승경전의 가장 오래된 텍스트는 <팔천송반야경>인데, 이것은 <보덕장반야경>의 요약집으로 볼 수 있다. <금강경>은 <삼백송반야경>으로 천상의 미륵보살이 주석을 한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금강경은 반야바라밀의 수행을 체계화해 티베트불교에서는 늘 이 논서와 주석을 중심으로 반야바라밀을 연구하고, 한국의 가장 큰 종단인 조계종도 소의경전으로 채택하고 있다.  
통상 불교문화적 차원에서 우리는 ‘반야’를 ‘지혜’로 번역한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지혜’는 매우 드물지만, ‘반야’는 그렇지 않다. 반야는 정신적인 사건이나 의식의 상태이다. 즉 분석과 탐구를 통해 얻어진 깨달은 상태이다. <아비달마집론>에서는 이를 “반야의 작용은 의심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러한 논서들은 존재의 실상에 대한 깊고 예리하며 정밀한 사유를 통해 얻어진 최상의 반야를 언급한다. 그런데 반야는 의심을 제거하기는 했지만, 불교적 관점에서는 불확실한 것이다. 설일체유부에서는 그래서 이것을 ‘거짓 반야’라고 평가했다. 
그렇지만 불교는 존재의 실상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관심이 있는 사유방법이다. 그래서 반야는 존재의 궁극, 참된 상황에 대한 올바른 통찰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비대승인 <아비달마구사론>에서는 반야를 단지 아비달마 분석의 종결점 분석을 표시하는 궁극적 법들에 대한 통찰로 판단한다. 한편, 초기의 대승론자들은 그래서 궁극적 실재로서의 ‘법’도 ‘공’하다는 ‘법공’으로 이해해서 법들이 자성이 결여된 궁극적 실재가 아니라고 보았다. 부파불교와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반야가 지혜의 완성(반야바라밀)이 아니고 불완전한 반야이다. 반야는 공성, 즉 법조차 자성이나 자아가 결여된 의식의 상태를 지칭한다고 본다. 

초조본 대반야바라밀다경 당나라 현장(602∼664)이 한역한 <대반야경>을 고려 현종(顯宗, 재위 1011∼1031) 때 간행한 초조대장경. 고려 전기, 1011~1031년 사이, 1권 1축, 전체 길이 2524.5㎝, 세로 29.1㎝, 국보 제241호.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팔천송반야경팔천송반야경은 반야부 경전 중 가장 오래되어, 대승불교의 근본이 되는 경전이다. 대승불교 초기인 서기 1세기경에 나타난 반야부 경전으로서, 가장 이른 대승불교의 경전 중 하나로 인정되고 있다. 고대인도 및 중국의 학승들은 십만송, 이만오천송, 일만팔천송 등의 거대 반야경이 먼저 성립되었고, 그것을 요약하여 팔천송이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다.


반야는 대승불교적 관점에서 분석에 의한 이해를 의미한다. 즉 존재의 실상을 명상을 통해 지적(知的)으로 아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분석에서 도출된 결과를 멸진정(滅盡定)의 체험으로 가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그래서 분별이 안되는 무분별적 지식(無分別智)을 지혜의 완성이라고 <섭대승론>은 설명한다. 즉 분석의 결과로서는 반야를 얻을 수 없으니 오히려 분석과 사유를 끊고 선사들의 입장으로 나아가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중국에 오면 대승은 반지성과 개념적 사고를 배격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무분별지(無分別智)도 분석에 기인한 의식의 상태이므로 역시 반야이고 지혜이다. 그래서 반야는 지금까지 분별적 이해와 무분별적 이해가 상호 연결된 형태로 보았다. 그러나 명상을 통해 이해 가능한 의미에서 반야와 반야바라밀다는 공 자체인 무분별지가 자각을 통해 분명히 알게 된다. 그래서 모든 법들의 참다운 모습은 부처님이 있거나 없거나 어떤 궁극적인 존재가 없는 ‘공’인 것으로 해석된다. 
대승불교는 궁극의 반야와 지혜의 완성을 반야바라밀이라고 한다. 불성의 완성을 위해 수행하는 보살들은 육바라밀같은 수많은 바라밀을 강조한다. 지혜의 완성이란 세속적 지혜를 초월한다. 그러나 대승은 모든 정밀한 분석을 통해 중생의 이익을 위해 완전한 깨달음을 얻겠다는 보살의 자비로운 선행을 도출함으로서 아비달마의 소극적 지혜를 뛰어넘는 실천행을 제시하고 있다. 
반야부 경전의 ‘지혜’는 모든 “산만한 사유를 일소하고 진정한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반야부경전들은 현학적 논쟁이나 철학적 논쟁에 빠지지 않았다. 중관학파같은 철학자들과 달리 반야부 경전들은 진리의 관점에서 행위와 존재의 참된 길을 제시한다고 설파한다. 즉 반야바라밀의 주장은 지혜의 완성이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자성이나 궁극적 실재는 없지만 오직 세속제에서만 보인다는 부처님의 인식에서 발생된 것이다. 그래서 모든 실체는 환상 속의 대상이다. 반야부 경전의 중요한 존재의의는 바로 부처님의 ‘무아’의 메시지를 모든 사물에 ‘무자성’이라는 ‘공’의 개념으로 확대한 것이다. 모든 것들은 그저 의식이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포말과 같은 부서지는 것이다. 파괴될 운명일 뿐이다. 그래서 수보리는 ‘닙바나’조차 환상과 같고 꿈같다고 말한다. 심지어 ‘닙바나’보다 더 뛰어난 어떤 것이 있어도 역시 환상과 같고 꿈과 같다고 천신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가르침이다. ‘무아’를 넘어 ‘법무아’와 ‘법공’이라는 영역으로 인식을 확대한다는 것이 이해하기 쉬운 가르침은 분명 아니다. 
지혜의 완성은 ‘공’에 대한 이해가 중심이다. 집착을 끊고 성인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 보고 제법무아를 이해하는 것이 반야바라밀의 길이다. 법에 자성이 있다고 믿는 아비달마는 궁극적인 존재, 즉 법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초기 반야부경전에서는 그러한 실재는 없으며 법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반야부는 그래서 제법무아(諸法無我)를 넘어 중생의 이익을 위해 보살의 광대한 선행과 자비를 실천해가는 것으로 귀결한다. 
반야는 실존적 해방이며, 미세한 집착도 끊어버리는 노력과 적응이 필요하고 또 두려운 포기에 이르는 것이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어떤 지혜도 없으며 
최고의 바라밀다도 없다. 
보살도 없으며 
깨달았다는 생각조차 없다.
이것을 듣고 놀라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면
보살은 선서의 지혜로 나아간다. 

이러한 것을 알고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지혜의 완성을 배운 
보살 마하살이다.
(팔천송반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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