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고학의 오해
상태바
제4장 고학의 오해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11.20 15: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대규 화백의 나의 수행록

교학은 오직 수행방법을 위한 것, 부처님 가르침이란‘수행’의 결과에서 나온 것
행복으로 가는 길은 수행을 통해 얻을 수 있고, 닙바나를 얻으면 교학은 확인되는 것
이론공부에만 매몰된다면, 굳이 앞뒤가 전도된 교학의 필요성 느끼지 않아

 

내가 리밋따를 만나기까지 다른 요기들에 비해 다소 소요된 시간이 짧았다고 할 수 있으나, 이미 훨씬 전부터 내가 경험해 온 그 많은 과정을 살피면 내 속으로는 파란만장했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굳이 말하는 자체가 적정치 않고 합당한 일이 아님을 왜 모르겠는가마는 그동안 인연이 되었던 여러 수행자들이 그들 나름대로의 노력에 비해 챙겨진 성과들이 약소한듯한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많은 수행자들이 투자한 시간과 노력이 좀 더 효율적으로 운용되어서 합리적인 정진활동에 다소나마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수행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나는 미얀마 양곤 부근에 있는 쉐우민  명상센터에 입소하여 요기로써 수행이란 것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불교에 대해서나 수행이라는 것에 대해서 잘 모르는 상태였다. 더욱이 초기불교에 대해서는 지극히 기본 상식도 갖고 있지 못했다. 심지어는 위빠사나가 무엇이며 사마타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초심자였다. 굳이 이 말을 하는 것은 그래도 몇 년이 지난 지금 최소한 한 발 앞서 명상의 방법이나 요령이라는 그 맛을 좀 보았다는 정도라서 자랑할 만한 꺼리는 못될지라도 경험에 비춰 확신은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나는 초보적인 수행을 시작하면서 이론적으로 명상에 대한 지식이나 상식을 전혀 갖추지 못했다. 소위 교학의 무식자였다. 그러나 그러한 무식이 그동안의 수행에 방해가 되거나 정진이 더뎌지게 했다는 바를 전혀 느끼지 못했고, 그랬을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이론적으로 모른다고 해서 수행이 안 되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는 것이다. 
리밋따가 떠 있는데, 그것이 근접 삼매 이전에 흔히 보이는 표상이라는 것을 모르고 본삼매로 알았다거나 리밋따란 이름 자체도 이해하지 못한 무식쟁이였지만, 수행의 진로는 나아가고 있었음이었다. 즉 이론적으로 필요한 내용들이 수행 중에 충분히 스스로 느끼고 알게 되는 것을 경험한 것이었다. 
그 리밋따를 조종하여 운용하는 것까지도 명상수행과정에서 스스로 느껴서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한 것들을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대견스럽고 신비로운 느낌도 경험했다. 그런 훨씬 후 또 다른 차원의 과정들을 겪으면서도 나는 책을 보지 않았다. 청정도론 3권이며 아바담마니하는 논장이나 논서들을 책장에 진열시켜 놓고도 읽지 않았다. 머리글이나 목차 등을 찬찬히 살펴보았을 뿐이었다. 그것은 그 많은 글씨들을 읽어봐야 내가 명상하면서 겪었던 그 수행담이 실려있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또한 앞으로도 무진장 남은 나의 수행과정에 관한 내용도 있을 터이나 내가 미리 이해하는 것이 오히려 내 수행에 역효과가 될 것이란 생각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의 생각과 행동이 지금까지 틀리지 않았음을 단정하고 앞으로의 수행 또한 그러리란 예단을 하면서 부처님께서도 교학을 먼저 공부하고 수행하신 것이 아니란 것을 모두 알고 있기에 내 방식에 위안을 갖는다. 
평소 존경하는 많은 이웃들 중에는 교학의 일가를 이루신 분들이 여러분 계시는데, 내가 여쭈어 본 적이 있다. 
“왜 그렇게 열심히 교학을 공부해야 하나요?”
그분의 대답은 매우 명료하고 단호했다. 
“수행을 잘하기 위해서... 더욱 잘 수행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 꼭 해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수행자는 교학이 없는 수행은 뱀의 꼬리를 잡는 것과 같다고도 하셨는데, 그 말씀은 지금도 난 이해되지 않아 좀 더 수행을 열심히 하면 이해되는 날이 올 것이라고 이해해 본다. 

삽화제자 김대규


내가 아는 수행자 중에 노승 한 분이 계시는데, 평생을 수행만으로 사셨으나 아직도 리밋따를 보지 못하고 수행이론 공부를 열심히 하셔서 선정에서부터 아라한이 되고 부처님이 되는 모든 과정을 이론적으로 속속들이 다 꿰고 계신다. 
선정에 든 다른 수행자가 인터뷰를 요청해오면 어느 스승 못지 않게 그야말로 일사천리 청산유수로 거침없이 자상하고도 상세하게, 그러면서도 장황하게 설명하신다. 심지어는 무슨 논장 몇 소절에 무슨 내용의 법구를 줄줄이 외우면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가히 도통한 분의 그것 같아서 감동적이고 감탄할 수밖에 없는 지경이다. 그런데도 수행의 실재에는 초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그 정황을 어찌 이해해야 할지 고민해 본다. 
실재와 개념이 동전의 양면 같아서 떼어 놓을 수 없다고 한다. 또한 손바닥과 손등처럼 분리할 수 없다고들 한다. 그러한 생각에 백번 동의하고 인정한다. 그러나 손등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손바닥을 알고 배우지 않아도 손바닥은 손등을 느낀다. 
교학은 수행을 돕기 위한 공부이며 수행이 있을 때만 교학이 소용된다. 수행이 없는 교학이야말로 빈 꼬랑지이며 수행이 실재할 때 교학도 인정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교학없이도 수행의 진척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명상 수행을 하시는 많은 분들이 교학에 몰두하여 수행을 잃어버린 예를 나는 무수히 보아왔는 바, 개탄스러운 것은 수행을 잃어버리고도 교학을 얻은 것을 수행이 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라한이나 부처님은 환상이나 착각을 하실 리 없거니와 인간은 환상이나 착각을 밥 먹듯 한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만으로도 훌륭한 일인 것인데 수행을 알고 그것을 공부한다면 인간으로서 최선의 역사요 인간보다 더 훌륭한 일이 아니겠는가?
많은 수행자가 많은 수행을 해서 닙바나*를 얻으시고 아라한이 되시고 성불하시어 윤회를 벗어나서 천상에 드옵시기를 기도한다.
사두! 사두! 사두!

*닙바나 : 우리나라에서는 ‘열반’으로 해석하며, ‘깨달음’을 뜻하고 수다원, 사다함, 아라함, 아라한의 각 단계마다 ‘닙바나’를 체험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