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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회‘순국선열의 날’맞아 도내 학생들 항일독립운동가 강창규 스님 기념비 참배무오년 법정사 항일 무장투쟁 기리고 강창규 스님의 민족정신 함께 되새겨
도내 학생들이 제80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대정읍 동일리 서산사 담장 밖에 있는 강창규 스님 기념비를 참배하고 있다.

11월 17일은 ‘제80회 순국선열의 날’이다. 이날은 1939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정기회의에서 정한 날이다. 임정에서 이날을 순국선열의 날로 정한 이유는 1905년 을사년에 행해진 ‘조약’이라는 탈을 쓴 ‘을사늑약’이 무효라는 점을 분명하게 국내외에 알리고, 조약이 강제 체결된 11월 17일을 전후해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국권회복을 위해 순국하여, 이날을 잊지 말고 우리 가슴속 깊이 새기자는 뜻이 담겨 있다.
2019년 11월 17일 제80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으며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왜 임시정부에서 민족 최대 치욕의 날인 11월 17일을 기념일로 정하고, 조국광복 다짐과 순국선열의 숭고한 정신 계승을 다짐했었는지 그 깊은 뜻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이날을 맞아 도내 학생들은 제주독립운동가 발굴 및 서훈추진위원회(운영위원장 이용중)가 주관한 독립운동가 유적탐방 행사에 참가해 항일독립운동의 큰 발자취를 남긴 ‘강창규 스님’의 기념비를 찾아 그 정신을 기리는 시간을 가졌다. 이날 행사는 이 지역 대정고등학교 학생회 임원들과 대안학교인 ‘보물섬학교’ 학생들을 주축으로 여러 학교 학생들이 참여했고, 교사와 학부모 등 70여 명도 함께 참여했다. 참가자들은 가까운 곳에 훌륭한 독립운동가의 유적이 있었는지를 지역에서도 잘 모르고 있었다며, 불교계가 앞장서서 제주도 항일운동의 기치를 올린 것에 특별히 주목했다. 즉 스님들의 무오년 법정사 투쟁에서 보듯이 제주도 최초의 항일독립운동을 이끈 것은 자신의 안위보다 나라와 민중을 먼저 생각하는 애민정신이 있어서 가능하지 않겠는가 하고 그 의미를 부여했다. 

강창규 스님은 민족사상에 고취된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고, 제주불교 발전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이날 행사를 주관한 제주독립운동가 서훈추진위원회 이용중 위원장은 “오늘날의 정세가 을사늑약이 있었던 1905년과 유사하다. 우리는 여전히 분단과 함께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대등한 지위를 획득하지 못해 불안한 상황이며, 특히 강제 징용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일본은 경제보복을 하는 등 여전히 우리가 주권국가인지 우려를 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제주도 최초의 항일투쟁인 무오년 법정사 투쟁의 주역 강창규 스님을 찾고 되새기는 일은 여전히 유효한 민족자존과 일본으로부터의 진정한 사과와 반성을 촉구하는 우리의 자세를 가다듬는 데 꼭 필요한 일이다. 특히 불교계에서 제주도의 항일운동의 선봉에 섰다는 점에서 제주도민은 물론이고 우리나라 전체가 그 의미를 되새겨볼 일이다. 육지에서는 3.1운동 민족대표의 면면을 보더라도 16명이 기독교계이고 15명이 천도교계인데, 불교계는 백용성 스님과 한용운 스님 등 두 분 밖에 이름이 오르지 못했다. 그런데 제주도에서만은 스님들이 최초로 항일 민족운동의 횃불을 올리고, 그것도 대규모 무장투쟁을 통해 주권을 회복하려 했다는 점에서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그 의미를 높이 추앙했다.  
참가자들은 이날 강창규 스님의 기념비 외에도 항일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투신한 선열 중에 4.3사건에 연루되어 시신도 없이 아직도 국가로부터 서훈을 받지 못한 고문수 지사의 허묘를 둘러보면서 미서훈 제주도 출신 항일운동가가 340여명에 이른다는 안타까운 마음을 안고 선열들의 거룩한 희생이 정당한 공적을 인정받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고대했다. 이날 학생들에게 강창규 스님의 행적에 대해서는 고영철 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이 상세히 설명하였다.

 

항일운동을 주도한 강창규 스님 행적기

법정사 무장투쟁으로 6년간 옥고, 제주불교 발전에도 큰 족적
 

강창규 스님이 창건한 서산사(대정읍 동일리)


강창규(姜昌奎, 1878∼1963) 스님은 오등동에서 태어났으나 사계리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본적은 안덕면 사계리로 되어 있다. 아버지는 강완석(姜琓奭), 어머니는 김인선(金仁善), 부인은 오문숙(吳文淑)이며, 아들은 강재문(姜在文), 동생은 강수오(姜壽五)이다. 
1892년 4월 8일 전라북도 임실군 죽림사(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에는 완주 위봉사로 표기되어 있다)에서 출가하였다. 근대 제주 불교 최초의 출가자이다. 초월 박만하 스님을 의지하여 득도하였다. 출가 이듬해인 1893년 하안거 해제일인 7월15일에 죽림사에서 박만하 스님에게 사미계를 받았다. 1905년 7월 15일 경상남도 하동군 칠불암에서 수선안거를 성만하고, 같은 해 강원도 건봉사에서 이보운(李寶雲) 스님 문하에서 사미과 및 사집과를 수료했다. 
이후 봉려관 스님과 김석윤(의병활동,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4묘역-162) 스님 등에 의해 한라산 관음사 불사가 원만히 진행될 무렵, 강창규 스님도 귀향하여 관음사에서 수행하게 된다. 관음사 서무와 관음사 해월학교 교사를 맡은 김석윤 스님과는 박만하라는 같은 스승을 모신 사형사제(師兄師弟)지간이었기에 두 스님은 매우 각별했다. 1913년 강창규·김석윤 스님은 방동화(房東華)를 자신들의 스승 박만하가 있는 경상북도 경주의 기림사로 보내 출가시켰으며, 방동화 스님은 당시 관음사에서 만난 강창규 스님에게 커다란 감명을 받고 출가를 결심하였다고 한다. 강창규는 민족사상이 고취된 독립운동가들과 비밀리에 교류 중이었다. 그중 김연일 등의 기림사 승려들을 제주도에 들어오게 하였다. 그의 능통한 법문에 대중들은 환호하였다. 

강창규 스님은 법정사에서 김연일·방동화 등과 함께 항일운동을 계획적으로 준비하였고, 거사 당일에는 군중을 이끌 조직의 선봉대장을 맡아 무력 항일 운동을 주도하였다. 전선 및 전주를 자르게 지시하였고, 일본인을 때리고 길가에 버려두도록 했으며, 중문 경찰관 주재소의 건물과 기구·문서 등을 파괴하도록 지시하였고 특히 주재소를 직접 불태웠다. 강창규 스님은 거사 이후 4년 3개월여를 은신하였다가 1922년 12월 28일에 체포되었다.
매일신보 1923년 2월 18일자에 실린 강창규 스님 체포기사에 의하면 “강창규는 김연일 등과 공모해 400여 명의 주민들을 선동, 주재소를 습격하고 불질렀다. 사건 이후 잠적했던 강창규를 제주도 상효리 화전동에서 체포했다”고 기록돼 있다. 강창규 스님은 당시 중문주재소 방화를 지휘한 혐의로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강창규 스님에 대한 기록은 일제의 1918년 형사사건부와 1918년 수형인명부 등에 기록돼 있다. 강창규 스님의 죄명은 소요 및 보안법 위반죄와 방화죄, 체포교사죄, 상해교사죄 등이었다. 
강창규 스님은 사건에 참여한 인물 중 가장 오랜 5년 11개월 8일의 옥고를 치른 후에도 일제의 치밀한 감시를 받아야만 했을 것이다. 그가 1951년 7월 20일에 직접 작성한 수행이력서에도 1905년 건봉사에서 사집과를 수료한 이후로 이렇다 할 활동내용이 없다. 25년이 지난 1940년이 되어서야 전북 임실군 임실면 죽림사에서 선시에 합격해 대선법계를 품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반세기 세월동안 일제의 지독한 감시가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강창규 스님에 대한 당시 매일신보 기사(1923년 2월 18일)


출옥 이후 죽림사에 돌아가 있다가 1943년 6월 7일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동일리에 서산사를 창건하여 출가사문으로서의 마지막 행적을 남겼다. 그 후 이곳에 머무르며 제주불교의 중흥을 위해 노력하였다. 1951년에 대한불교 제주교무원의 고문으로 선임되었으며, 1963년에 서산사 서쪽 바위 위 비석이 세워져 있는 자리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자세로 입적하였다고 한다.
강창규 스님을 기리는 비석은 대정읍 동일리 3161번지 서산사 담장 밖 바닷가를 향해 서있다. 비문의 내용은 “불기 2512년[서기 1968] 2월 22일 故姜昌奎和尙碑(고 강창규 화상비) 성주사 주지 안성원 스님”이라고 새겨져 있다.
강창규 스님은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참여에 대한 공훈으로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그리고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도순동에 있는 무오 법정사 항일 운동 발상지(戊午法井寺抗日運動發祥址)에 건립된 의열사에 영정이 모셔져 독립운동의 뜻이 기려지고 있다.
항쟁을 이끌었던 김연일 스님이 산방산 꼭대기에 있는 작은 굴에 숨어 있던 적이 있다고 하는데 그때 강창규 스님이 김연일 스님을 위해 몰래 끼니를 맞춰 갖다 드렸다고도 한다.

(자료 제공: 고영철 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제주불교신문  jejubulgy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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